김시종, 정인, 양석인 등 재일조선인 젊은 시인들에 의해 1953년 2월에 창간되어 1958년 10월까지 총 20호가 발행되었다. 이후 『진달래』의 뒤를 잇는 『갈리온』·『원점』·『황해』가 간행되었으나 『갈리온』은 3호, 『원점』과 『황해』는 각각 1호에서 종간되었다.
창간호부터 14호까지는 2~3개월 간격으로 발행되었고, 표지에는 한글 ‘진달래’가 새겨져 있다. 15호부터는 한글이 아닌 ‘진달래’ 음을 일본어로 표기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그 발행 간격도 3개월에서 5개월까지로 벌어진다. 『진달래』의 방향성을 둘러싼 정치적 분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간호에는 ‘진달래’라는 시가 실려 있고, 여기에 진달래는 ‘조선의 산야에서 가장 많이 피는 꽃’이며 ‘조선의 국화’라는 설명이 딸려 있다. 김시종은 『진달래』에 대해서 당시 미국과 싸우던 북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문학의 장이었다라고 말했다. 1950년대라는 혼란의 시대에서 재일조선인 시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학운동이 『진달래』를 통해 전개되었다.
이 잡지는 손으로 쓰여 등사 인쇄된 것으로 그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은 ‘환상 시집’이었으나, 2008년 11월에 일본의 불이출판(不二出版)에 의해 복각본이 간행되었다.
『진달래』는 반미, 민족주의의 투쟁 시와 더불어 재일조선인의 일상 시 등을 싣고 있다. 시뿐만 아니라 1호부터 6호에서 마련된 ‘안테나’는 문학 장르가 표현하기 힘든 재일조선인의 일상에 관련된 뉴스를 다루고 있다. 4호, 11호에서 보이는 르포 형식의 글과, 15호, 17호에서 보이는 조국문화를 주제로 한 글들은 『진달래』가 문학동인지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점점 재일조선인 내부와 외부의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조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혼란의 1950년대를 살아간 재일조선인의 지향점과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다. 7, 8, 9호에서는 ‘국어작품란’을 마련해 한글 시 짓기를 시도하고 있으며, 13호와 14호에서는 ‘국어 작품’을 다수 게재하는 등 ‘국어’와 일본어 사이에서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정립하려던 노력과 그 좌절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반미와 민족주의 투쟁을 통해 일본만을 시야에 두지 않는 세계사적 조망이 당시의 다른 재일조선인 시동인지와 차이를 보인다. 해방 후 최초로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문학의 영역에서 물으면서, 재일조선인의 독자적인 주체성을 표출한 잡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