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한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나성지방회 재무, 구미위원부 사무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에 대한 선전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4년(고종 31)
출생지
강원도 양구 해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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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나성지방회 재무, 구미위원부 사무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에 대한 선전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개설

대한인국민회와 구미위원부, 그리고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등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클리블랜드(Cleveland)와 애크론(Akron)에 살면서 3·1절 경축식을 거행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개편지』를 창간해 한국 독립을 위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부에 대한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해방 후 샌프란시스코 초대 총영사를 역임하였으나, 친이승만의 정치선전활동을 전개하여 재미 동포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0년대 후반경 부친 김양식을 따라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1913년 6월 이승만이 설립한 한인중앙학원의 전신인 한인기숙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9월 김계봉, 오용운, 이한용, 박관모 등과 한인학생동맹회(회장 김계봉)를 조직하고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14년 4월 한인중앙학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금주회(회장 양유찬)에서 서기로 활동하면서 술, 담배, 놀음, 아편을 금지하는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4월 유학을 목적으로 북미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공립중학교를 다녔다. 1916년 12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나성)지방회 임원 개선 때 학무로 선임되어 1917년 8월 17일 이갑 참령의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나성지방회의 재무로 선정되었고 3·1운동을 계기로 대한인국민회에서 독립의연금 모금을 추진할 때 로스앤젤레스지역 수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4월 8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윤병구가 미주한인사회와 대한인국민회의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재미국민대회 임시평의회를 개최할 때 한봉석과 함께 남가주 대표가 되어 참석하였다.

1918년 로스앤젤레스의 성경학원에 들어가 잠시 신학을 공부하다가, 1920년 11월 인디애나주로 가서 그 곳의 테일러대학을 졸업하였고, 1924년부터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구미위원부 사무원이 되었으나, 공부를 목적으로 그 해 8월 사임하고 클리블랜드로 돌아왔다. 클리블랜드에서 미국인들을 상대로 강연과 선전활동을 통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였다. 1924년 3·1운동 독립 경축행사를 오벌린 한국친우회 회원들과 함께 거행하며 ‘3월 1일의 감상’을 연설하였고, 오벌린대학 한인여학생의 주도로 한국토산물 전시회도 개최하였다.

1926년 1월 클리블랜드의 미국인 교회 청년 150여 명을 상대로 ‘한일 간의 관계’라는 연설을 하고 일본의 한국인 학대 사진을 환등기로 소개하였다. 1927년에도 허진업 등 한인 11명과 함께 클리블랜드에서 3·1운동 경축행사를 거행하였다.

1930년 전후부터 클리블랜드에서 음식점 음식재료 배달 상점을 개업하였고, 이후 오하이오주 애크론으로 이거해 음식사업을 확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상점 앞에 커다란 선전 간판을 부착해 일화배척과 한·중 간의 우의를 고창하였다.

1943년 3·1절 기념행사 때는 현지 시장과 주요 미국인 인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성대한 경축식을 거행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 결의안을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상하 외교위원회에 보냈고, 오하이오주의 상하 의원과 애크론 지역의 의원들에게 보내 임정 승인을 호소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영사 및 초대 총영사이자 외자구매처 이사관으로 활동하였다. 총영사 시절 친이승만계 인물 중심으로 활동하다 샌프란시스코 한인들로부터 총영사 소환 요구를 받고 1960년 사임하였다.

1942년 11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공개편지』라는 한글판 월간 잡지를 발행하였다. 이것은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된 『민언』을 계승한 것으로 한국의 독립을 선전하고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알리는데 기여하였다. 해방 후 『공개편지』는 이승만의 치적을 홍보하는 정치선전수단으로 활용되다 1970년 전후경 폐간되었다.

참고문헌

『신한국보』
『신한민보』
『국민보』
『구미위원부통신』
『동아일보』
『공개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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