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전을 계속했으나 막대한 전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05년 7월 2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8월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회의(1905.8.10∼9.5)를 개최할 것임을 공표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하와이 한인사회는 7월 12일 하와이 임시공동회를 개최하고 윤병구를 총대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7월 15일자로 윤병구를 “일아강화회의(日俄講和會議)에 본국 관계가 심중(甚重)하기로, 이를 시찰하기 위하여 좌하를 총대로 선거하고 전권을 위임함” 란 내용의 임명장을 회장 김이제(金利濟), 서기 김호연(金浩然), 총무 송석준(宋錫俊)의 이름으로 전달하였다.
때 마침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가 미일 간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도중 7월 14일 잠시 호놀룰루에 기항할 때 윤병구는 와드만(John Wadman) 감리사와 하와이 총독대리 앳킨슨(Atkinson)의 도움으로 태프트를 만나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받았다. 또한 윤병구는 와드만의 소개로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 사이토 미키(齋藤幹)를 만나 미국주재 일본공사관 히오키 에키(日置益) 서기관 앞으로 보내는 소개장도 받았다. 이것은 강화회의에 참가하는 일본대표단으로부터 한국 독립을 보증받기 위함이었다.
전권 대표로 선출된 윤병구는 당시 조지 워싱턴대학교에서 수학 중인 이승만에게 연락해 동반 활동을 제의하였다. 원래 윤병구의 계획은 러일강회의에 참관해 외교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참관활동 보다 미국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고 활동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것은 태프트로부터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받으면서 1882년 5월에 체결한 조미수호조약에 근거해 미국 정부의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윤병구와 이승만은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 베이에 있는 새거모어 힐(Sagamore Hill)로 가서 8월 4일 루즈벨트 대통령을 직접 만나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청원서는 「하와이 거주 한인들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Petition from the Koreans of Hawaii to President Roosevelt)」이다. 주요 내용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러일강화회의 개최 시에 한국의 주권과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거중조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대한제국의 문제에 개입해야 할 이유로 한국 내 미국의 이권이 많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미국의 이익과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항에 의거해 위협받고 있는 대한제국의 주권문제에 공평한 대우를 요구하였다. 그런데 루즈벨트는 내용을 읽어본 후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관을 통해 국무성에 제출해 달라는 말만 남긴 채 청원서를 다시 돌려주었다.
루즈벨트는 이미 두 사람이 당도하기 전에 일본에 보낸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와의 회담에서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묵인하는 대신 한국을 보호국화 하겠다는 일본의 계획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개진하도록 7월 31일자 전보로 동경에 훈령을 보낸 바 있었다. 따라서 태프트의 소개장이나 루즈벨트의 접견은 모두 형식적인 겉치레로 두 사람을 기만하는 행위였다. 이런 내막을 알 수 없었던 윤병구와 이승만은 1882년 5월에 조인된 조미수호조약을 근거로 미국정부의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다. 더구나 워싱턴의 주미 대리공사 김윤정(金潤晶)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본의 지령에 따라 청원서 전달을 거부함으로써 두 사람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러일강화회의는 미국과 러시아의 묵인과 승인 속에서 한국을 보호국화 하려는 일본의 의도대로 종결되었다. 윤병구와 이승만은 미주 한인을 대표하여 대한제국의 주권과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냉엄한 국제 현실에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그러나 두 사람의 외교활동 노력은 미국 언론에 소개되어 한국문제를 미국사회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러일강화회의를 대비해 대한제국의 주권과 독립을 보전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그 성과의 여부를 떠나 미주한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다. 국가와 민족의 위기에 대한 대응이 정부 차원으로 국한될 문제가 아니라 전 민족적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 이번 외교활동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