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2월 5일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1900년대 말경 하와이로 이민 간 것으로 보인다. 평생을 하와이에 거주하면서 전 생애를 대한인국민회와 한국독립당하와이총지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4년 6월 박용만이 오아후(Oahu)섬 가할루(Kahalu'u) 지역에 독립운동을 위한 군인양성 기관으로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했을 때 훈련대 소대의 참위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오운·최선주·이보국 등과 함께 하와이의 와히아와(Wahiawa)에서 제1세 동포와 미주에서 출생한 제2세 동포 간의 상업과 사교를 장려하기 위한 조미구락부를 조직하였다. 초대 총재 오운에 이어 2대 총재(또는 이사장)가 되어 1940년대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조미구락부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김구로부터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경제적으로 큰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28년경부터 김경옥·김예준·김성옥·현도명·김태정·김형기·김기순 등과 비밀리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을 지원하였다. 특히 1931년 11월 15일자로 김구에게 보낸 1,000달러는 이후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와 같은 한인애국단의 활동에 기여하였다.
윤봉길 의거 직후인 1932년 5월 22일 물질과 정신으로 임정을 공식 후원한다는 취지로 오아후섬 와히아와에서 그 지역 한인 37명과 임시정부후원회(이사장 김기순)를 결성하였다. 결성한 날 선우혁·현도명·김려준·최성찬·김성옥·김경옥 등과 함께 최고 약정 금액인 24달러 이상을 바치기로 약정하며 임정 후원에 적극 동참하였다. 임시정부후원회는 『시사근문』이라는 소식지를 발행하였고, 한인애국단을 적극 후원한다는 목적으로 1934년 4월 10일 자체의 회명을 하와이애국단으로 바꾸었다. 이 때 임성우는 초대 단장이 되었다.
1935년 11월 김구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위해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한국국민당이 중국 관내지역 민족주의 우파세력을 결집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자 하와이애국단도 이에 호응하였다.
먼저 같은 목적으로 임정을 후원하고 있던 가와이섬의 단합회와 합동 교섭을 추진하였고, 그 결실을 위해 1939년 5월 임성우가 직접 가와이섬으로 가서 교섭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두 단체는 무조건 합동하기로 결정하고, 통합된 단체명을 대한국민당으로, 총부는 하와이에 두되 임원 조직은 중국의 한국국민당 본부에서 장정을 얻어 시행하거나 하와이 내 지방자치의 인준 후 실행하는 것으로 하였다. 두 단체의 합동 추진은 한국국민당 하와이지부를 만들기 위한 시도였으나, 이후 단합회와의 합동 교섭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대신 하와이애국단은 1940년 5월 9일 중경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자 한국독립당하와이총지부로 변경하였다. 임성우는 초대 집행위원장이 되어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적극 후원하였다.
1930년부터 와히아와 지역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공동으로 전개하기 위해 와히아와공동회(회장 오운)를 조직하자 1931년 3월 8일 임성우는 김기순, 송석순 등 7인과 함께 이사부에 참여하였다. 와히아와공동회는 독립저축금을 모금하고 3·1절을 공동 행사로 치렀다. 일본의 만주침략 이후 외교활동을 협력해 추진하기 위해 1933년 4월 9일 동지회·임시정부후원회·대조선독립단·동생회·조미구락부·와히아와공동회 등과 함께 한인연합협의위원회가 설립될 때 임성우는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한인연합협의위원회는 『협의회보』를 발간하였고, 그 해 7월 하와이를 방미한 김규식의 환영과 그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의연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성우는 1934년 와히아와에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처음으로 창립될 때 기여하였고, 1935년도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선임되었다.
1936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재무로 활동하였고, 중일전쟁 발발 직후 하와이 국민회가 임시정부의 군사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찬무부를 조직하자 재무가 되어 혈성금 수합에 앞장섰다. 해방 후인 1954년부터 2년간에도 또다시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