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규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한 기업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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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한 기업인.
개설

농장 및 상점을 통해 번 수익을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을 위해 의연하며 한국의 독립을 도왔고, 귀국한 뒤 환구동우회를 조직해 지역사회의 발전에 헌신한 인물이다. 1900년대 후반경 미국으로 이민 간 뒤 캘리포니아주의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스탁톤과 다뉴바와 네바다주의 로간 등에 살면서 상점과 과일농장을 운영하였다. 성실하고 사업 수단도 있어서 1913년에는 2천여 달러의 수익을 얻을 정도로 사업을 성장시켜, 1923년 다뉴바의 상점의 경우 6∼7천 달러의 가치로 확장하였다. 1929년 그 동안 일군 모든 사업을 정리한 1만 달러를 갖고, 10월 1일 가족 모두를 데리고 귀국해 평양에서 살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근면하게 일하면서 얻은 수입을 미주한인사회의 발전과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금액으로 의연하였다. 공립협회의 기관지인 『공립신보』와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발전을 위해서도 의연금으로 도왔으며, 3∙1운동 발발 이후 확산된 독립의연금 모금운동 때에는 141달러라는 거금을 의연하였다.

1917년 1월 20일 설립한 북미실업주식회사(사장 임준기)에 안창호, 송종익, 맹종호, 임준기, 김사원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흥사단 단원이 아니었으나, 임준기와 송종익과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의 이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부터 22년까지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의 재무로 활동하면서 경신참변(1920.10)으로 희생당한 간도의 한인들을 돕는데 워싱턴군축회의(1921.11.12∼1922.2.6)를 대비한 특별외교비 의연금 수합에 앞장섰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개조를 둘러싸고 국민대표회 결성 소식이 미주에 들려오자 1921년 11월 25일 이영수, 조울림, 송헌주, 한시대, 임성택 등과 함께 다뉴바 국민대표회기성회(회장 이영수)를 조직하고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지원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1922년 들어 재정문제로 곤란을 당하자 20달러를 지원해주었고, 1923년 1월에는 다뉴바지방회의 회장 대리를 역임하며 대한인국민회의 사업을 도왔다. 1923년 3월 22일 스탁톤에서 문양목, 신형권, 김승길, 허규, 박영순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지방회(회장 문양목)를 조직하고 구제원으로 활동하였다.

20여 년간 미국에서 과일 농장과 과일상점 등으로 번 모든 재산을 정리해 남은 1만 달러를 갖고, 1929년 10월 1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고향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평양에 자리 잡고 1935년 6월 29일 평양YMCA회관에서 평양기독교청년회 소년부장 조웅천, 김지수, 박신철, 이용직, 최윤호 등과 함께 환구동우회(회장 김지수)를 조직하고 이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평양에는 미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실업가와 유학생들이 100여 명 되었는데 환구동우회는 이들과의 상호 친목과 지역 사회에 대한 유익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참고문헌

『공립신보』
『신한민보』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혜안, 2004)
『송철회고록』(이상수, 키스프린팅,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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