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발발이후 미국이 참전을 대비하기 위해 국방공채 발매를 개시하고, 미주한인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미국방후원활동을 전개하면서 비롯하였다. 미국방후원활동은 1940년 10월 6개의 단체가 연합해서 만든 연합한인위원회 결성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41년 8월 13일 중한민중동맹단 주최로 호놀룰루에서 이경선 초청 만찬회를 개최할 때 공채발매를 결행하면서 공채표 발매활동으로 전개되었다.
미국방후원활동은 1941년 9월 하와이의 한인들이 국방공채위원회를 설립하면서 본격화 하였다. 국방공채위원회는 회장 양유찬, 부회장 권도인, 총무 김창수, 서기 정봉관, 공채위원 이태성으로 구성되었다. 1943년 1월 조직의 명칭을 한미공채위원회로 바꾸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공동 발매를 추진하였다. 대체로 1944년까지 하와이 한인들이 발매한 미국방공채 금액은 65∼70만 달러였다.
공채발매활동이 자발적으로 시작되어 하와이 전역으로 확산되자, 미주한인 최대의 독립운동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는 1943년 7월 10일부터 8월 29일 경술국치일까지 한시적으로 한미승전후원금모집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설립 목적은 국방헌금을 조직적으로 모금해 미국국방을 전적으로 후원하기 위함이었고, 조직 결성에 참여한 수는 23명이었다.
한미승전후원금모집위원회는 위원장 정덕흥(鄭德興), 재무 김원용으로 구성하여 대대적인 승전후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금한 승전후원금은 총 26,265달러였다. 모금한 승전후원금은 모두 하와이 군정부에 전달되었고, 기간 종료 후 모금된 429달러는 미국적십자사 하와이지부에 기부되었다.
하와이에서 시작된 미국방후원활동은 미국 본토로 확산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미일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7∼9일 긴급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미국국방후원을 위한 활동을 결의하였다. 이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미국 재무부 국방공채국의 위임을 받아 본격적인 국방공채 발매활동에 나섰고, 1943년 5월 이를 촉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미전시저금위원회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이렇게 해서 발매한 국방공채는 1945년까지 약 55∼60만 달러에 달했다.
미주한인들이 미국 국방후원을 위한 공채발매활동과 승전후원금 모금활동에 적극 나선 것은 전쟁 상태에 빠진 미국에 대한 헌신과 충성심을 보여 더 이상 적성국 외국인으로 취급받지 않을 것과 미일전쟁에서 미국의 승리를 기원해 장차 한국의 독립을 이루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