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퇴치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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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사건
문맹퇴치를 위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국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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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문맹퇴치를 위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국민운동.
내용

1900년대 지식인·관료·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으며, 1910년의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한국에서 전개된 문맹퇴치운동은 애국계몽운동과 궤를 같이한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을 전후해 지식인·관료·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많은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1907년에는 마산에서 최초의 노동야학이 설립되고, 국권피탈 뒤에도 전국 각지에 많은 야학이 생겼다. 신문과 잡지도 애국심 고취와 국민 계몽의 일환으로 활발한 문맹퇴치운동을 펼쳤다. 1931년부터는 조선어학회의 후원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조선어강습회가 열리는 등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문맹퇴치운동은 계속되었다.

그밖에도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각종 애국·농촌계몽운동에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문맹퇴치운동도 포함되었는데, 그런 만큼 이 시기에 행해진 문맹퇴치운동은 민족 독립을 위한 계몽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광복 후에는 야학과 천막학교, 고등공민학교, 재건학교, 새마을학교 등을 중심으로 문맹퇴치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 역시 순수한 문맹퇴치 외에 봉건제도 타파, 도시 빈민·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 농어촌 계몽운동 등 시대적·사회적 문제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1954년, 1961년 두 차례에 걸쳐 국민운동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1954년 한국전쟁 정전 이후 국가에서 전국문맹완전 퇴치 계획을 결의하였다. 교육부, 내무부, 국방부, 공보실, 농림부, 보건사회부 등이 합동하여 정부적 차원에서 국민교육반을 조직,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각급 학교 교원 및 정부에서는 이 운동을 각각 5차례에 걸쳐 실시하였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 75일, 81일, 71일, 90일, 70일간 씩이었다. 참여한 총교육반은 246,173개반이었으며, 지도자 265,602명이었다. 총 4,738,968명의 문자해독자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이 운동은 1961년 12월부터 1962년 4월까지 국가재건운동본부 산하에서 다시 재개되었다.

참고문헌

「이승만 집권기 교육과 민주주의」(박명림,『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2006)
「근대계몽기 이후 문맹퇴치 및 계몽 운동의 흐름」(허재영,『국어교육연구』1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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