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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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부터 신앙공동생활을 위해 설립된 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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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57년부터 신앙공동생활을 위해 설립된 촌락.
내용

1957년 박태선과 그를 따르는 목사 및 장로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는 신앙공동생활을 위해 설립된 촌락이었다. 신앙촌에서는 각종 생필품을 만들어 시중에 공급하였다. 신앙촌은 각종 생필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등 신도들의 경제적 자립구조를 갖추며 매우 독특한 집단 거주 지역을 형성하였다.

1980년 5월 23일 박태선은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이었음을 선포하고 새로운 종교인 ‘천부교(天父敎)’라는 종교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이탈자들이 생겨났으며 신앙촌은 갈등과 반목의 세월이 계속되었다. 1990년 2월 7일 박태선이 사망한 이후에도 천부교 신도들과 기존의 예수교 신도들 사이에 교회재산을 놓고 신앙과 재산분쟁이 계속되었다.

신앙촌은 3차례에 걸쳐 형성되었다. 제1신앙촌은 ‘소사신앙촌’이다. 1957년 11월 1일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범박리 일대에 착공된 최초의 신앙촌이다. 약 1만여 명이 입주하였으며, 마을 안에 각종 생활용품 및 악기를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제2신앙촌은 ‘덕소신앙촌’이다. 1962년 7월 21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덕소리 일대에 착공되었다. 소사신앙촌에 있던 생산공장들을 이전하고, 약 6천여 명이 입주하였다. 이곳에서는 소사신앙촌에서 생산하던 품목 외에 철강 등 중공업 분야 공장까지 건설되었다.

제3신앙촌은 ‘기장신앙촌’이다. 1970년 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죽성리 일대에 세워졌다. 50여 개의 생산공장을 세우고 약 5천여 명이 입주하였다. 1971년 12월 29일 이 지역 일대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추가 시설 확장은 중단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 소사 및 덕소신앙촌이 재개발되어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신앙촌이다. 이 곳에는 천부교 본부와 박태선의 묘소가 있다.

1957년 부천에 신앙촌이 처음 건설되면서부터 신앙촌에는 기업과 생산 공장이 세워졌고, 이후 신앙촌 기업은 신앙촌 주민들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천부교의 주요 수입원이 되어 ‘시온그룹’이라는 기업집단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신앙촌 계열사인 ‘시온합섬’은 제9회 수출의 날(1972년 11월 30일)과 제10회 수출의 날(1973년 11월 30일)에 각각 석탑 및 철탑 산업 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덕소신앙촌의 형성과 가옥구조」(신중성,『국토지리학회지』9, 1984)
「한국 예수교 전도관 부흥협회: 천년성의 꿈에 부푼 신앙촌 왕국」(탁명환,『현대종교』1-3, 1971)
「박태선과 종교주식회사: 신앙촌이라는 이름의 천년복지」(오소백,『신태양』,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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