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계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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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사건
1960년부터 전개된 학생운동 차원의 대국민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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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60년부터 전개된 학생운동 차원의 대국민계몽운동.
내용

4월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동년 5월 한달을 학원 문제 시비로 보냈다. 그러면서 정치변혁은 학원민주화운동만으로 성취될 수 없다고 자각하고 사회운동 차원으로 그들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국민계몽운동으로 나타났다. 민주주의는 제도의 개선만으로 성취될 수 없고, 정치에 참가하는 국민들의 정치의식 고양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학생들의 국민계몽운동은 농촌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운동이 일어난 것은 독재정권의 유지가 국민의 무지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국민들을 계몽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1960년 6월 10일 서울대 학생회가 결의한 후 서울 문리대에서 ‘농촌으로 가기운동’을 전개하였다. 7월 6일 서울대에서 국민계몽대를 결성하고 8일부터 11일 사이에 7천여명을 전국 각지로 파견하였다. 연세대에서는 ‘지역사회 개발대’를, 중앙대에서는 ‘농촌생활연구회’ 등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국적인 조직도 결성되었다. 예를 들어 ‘전국사대총연맹’과 ‘전국대학농촌연구연합회’ 등을 들 수 있다.

서울대 국민계몽대는 4월혁명 정신의 보급, 국민정치의식과 주권의식의 고양, 경제복지의 추구, 신생활체제의 수립, 그리고 민족문화의 창조 등을 강령으로 삼고 활동하였다.

주요 활동은 직접 일손돕기, 의대생들은 진료소 설치 운영, 강연회 개최 등이었다. 이들이 농촌계몽운동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7·29 선거의 중요성과 투표방식, 투표의 판단 기준 등에 대한 선거 계몽이었다.

신생활운동은 서울과 부산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가장 활동이 두드러진 단체는 서울대 국민계몽대의 신생활 운동반이었다. 신생활운동반은 ‘사회개혁은 우리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캬바레, 빠, 다방 등으로 찾아다니며 외래품 사용 금지를 호소하였다. 또한 관용차 사용(私用)을 단속하며 퇴폐적인 풍조를 고발하였다.

학생들은 혁명의 이후를 과도정부에 맡긴 채 국민계몽운동을 혁명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이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농촌에 대한 경험 부족과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의욕만 나선 나머지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신생활운동은 국산품애용운동, 교복간소화운동, 허례허식 추방운동, 녹화사업, 국토개척사업 등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의 이면에는 미국 원조가 가지는 불합리함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한국 경제의 자립에 대한 고민들이 내재해 있었다.

참고문헌

『한국근현대사사전』(한국사사전편찬위원회, 가람기획, 2005)
「4월혁명기 학원민주화운동과 국민계몽운동」(정계정,『성대사림』12·13,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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