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목조 불좌상(석가불)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 있는 조선 말기의 목조불좌상이다. 영암 도갑사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1938년 조계사로 옮겨왔다. 이후 줄곧 조계사 대웅전의 주존불상으로 봉안되다가 지금은 대웅전의 별도 공간에 봉안되어 있다. 우리나라 불상 조각사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통일신라 양식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것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근대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전통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의 불교미술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불상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전반적인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을 따르고 있지만, 불안(佛顔)의 이목구비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의 표현과는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서양의 조각양식이 전래한 이후에 나타난 조각기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의 편단우견상과 달리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 주름이나 사선으로 내려오는 옷 안쪽에 주름진 내의의 자락이 보이는 표현 등은 이 불상이 근대기에 만들어진 불상임을 추정케 해준다.
세부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우선 육계, 즉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고 뾰족하여 마치 동남아시아 불상의 영향을 받은 듯하며 더불어 이국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러한 육계는 조선시대 불화에는 종종 등장하지만 조각으로 표현된 경우는 드물다. 얼굴은 갸름하고 눈이 위로 많이 치켜 올라갔으며 입술은 작게 표현되어 전반적으로 이목구비가 역삼각형의 구도를 이룬다. 명상에 잠겨있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또렷한 정신으로 예불자를 바라보는 듯하다. 신체에 비해 작은 불두의 비례도 전통적인 불상에서는 드문 표현이며 현실적인 인체 비례와 닮아 있어 서양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항마촉지인을 결한 당당한 자세는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무렵의 불상양식을 충실히 반영한 반면, 그 위에 걸친 가사의 옷 주름 표현은 굵고 강하게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에 더 가까운 편이다.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옷 주름은 보다 얕은 부조로 얇게 표현되어 인체를 부각하는 특징이 있는데, 조계사 목불좌상은 인체와 옷 주름을 모두 강조하려는 조형성이 엿보인다.
원래는 영암 도갑사(道岬寺)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1938년 옮겨온 것이다. 현재의 대웅전도 원래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 있던 보천교 십일전(十一殿)을 옮겨온 것인데, 이때 불상을 새로 조성하지 않고 전국의 사찰에서 물색하여 도갑사로부터 이관하여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1938년에 옮겨온 이후 줄곧 조계사 대웅전의 주존불상으로 봉안되었으나 대웅전의 규모에 비해 불상의 크기가 작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2006년에 새로 조성한 삼세불상과 교체되었다. 지금은 대웅전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여 따로 봉안하고 있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불상 조각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통일신라 양식을 기초로 이후의 다양한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특히 서양식 미술교육을 접한 우리나라 근대기 조각가들은 전통미술 중에서 사실주의 양식이 가장 많이 반영된 통일신라 조각을 이상적인 양식으로 간주한 경향이 많았는데, 아마도 그러한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해보면 이 불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근대 조계종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면서 종단의 가장 중요한 법당에 주존불로 모시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종단이 추구하던 이상에 가장 부합한 이미지였기 때문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선택과정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전통적인 양식이 혼합되어 있지만 이 역시 시대의 반영이며 조각기법이나 조형성이 우수하기 때문에 전통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 불교미술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