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현사 석불 좌상 ( )

조각
유물
문화재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사현사에 있던 조선시대의 석불좌상.
정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사현사에 있던 조선시대의 석불좌상.
내용

불상을 소장하고 있는 사현사의 연혁에 관해서는 안성 칠장사에 있는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이 절은 고려 전기인 1045년(정종 11)에 혜소국사가 창건하였는데, 한때는 대가람을 형성했다고 한다. 처음에 위치한 곳은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인왕시장 일대(홍제동 296번지)인데, 1972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시가지 확장공사로 인해 철거되어 인근(홍제동 105-3번지)으로 이동하였고, 1994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전시 중인 서울 홍제동 오층 석탑(보물, 1963년 지정)도 원래는 홍제동의 사현사 절터에 함께 있던 것이다.

사현사 석불좌상의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82년에 제작된 칠곡 천주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나 1458년의 영풍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처럼 결가부좌한 하체에 비해 상체가 긴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조선 초기의 불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러한 신체 비례의 전통은 포천 출토 철불좌상이나 원주 학성동 출토 철조약사여래좌상 등의 고려시대 철불에서도 일부 보이는 양식이기도 하다. 형태적으로 보면 우선 핼멧을 쓴 것처럼 커다랗고 뾰족한 머리모양이 특징적인데, 육계가 머리와 따로 구분되지 않고 솟아있어 이처럼 특이한 형태가 되었다. 이러한 모습도 천주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흡사한 부분이다. 짧은 목에는 삼도를 표현한 흔적이 보이고, 통견의 착의법을 보이는 양쪽 어깨는 좁고 급격한 경사를 이루며 축 처진 듯, 혹은 앞으로 구부린 듯한 느낌이 든다. 넓게 벌어진 대의 사이로 내의와 띠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에 올려놓았는데, 양손 모두 손등이 보이게 안쪽으로 향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손바닥이 앞을 향하는 시무외인 혹은 설법인의 형식과는 다르다. 일부에서는 이 불상을 미륵불로 소개하고 있으나, 뚜렷한 근거는 없고, 천주사, 흑석사의 사례에서와같이 오른손을 올리고 왼손은 내린 유사한 수인을 하고 있는 상들이 아미타불로 제작되었음을 고려하면 아마도 아미타불이 아니었을까 추정해볼 수 있다.

현황

현재의 사현사는 법당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임시 법당이었으나 이마저도 2012년 4월에 화재로 전소하였다. 이 불상은 다행히 소실을 면했으나 그을음의 피해를 보아 조계종 산하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존처리를 받고 위탁보관 중이다.

의의와 평가

이 불상의 조성 시기를 조선 초기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당시의 불상 대부분이 목조나 건칠, 마애불이라는 점에서 석불로 조성된 매우 특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석불은 백석이나 옥석으로 비교적 소규모의 상을 만든 경우는 많이 있으나, 이처럼 1m가 넘는 대형 석불상을 조성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따라서 이러한 불상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관해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만약 불상의 조성 연대를 고려시대로 본다면 강원도 강릉시 청학사 석불좌상 등과 같이 참고할 만한 사례를 다수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사찰문화재: 전국 사찰문화재 일제조사 서울특별시』(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3)
집필자
주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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