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상은 원래 강원도 철원의 심원사에서 전해오다가 6·25전쟁 전후의 시기에 환희사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심원사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란 때 불에 탄 이력이 있는데, 그 와중에 화재를 피했다가 환희사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아담한 비례를 보이는 신체에 비해 머리는 다소 큰 편이다. 머리 부분은 육계를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정상계주를 낮고 넓게 표현했으며, 중간계주는 그 아래로 길게 누운 형태로 표현하였다. 많이 수그린 얼굴은 원만하면서도 턱선을 조금 강조하였고, 이목구비의 표현은 입술이 코의 너비만큼 작게 표현되어 전반적으로 마치 ‘T’자를 연상케 하는 배치를 보인다. 두 눈은 지그시 감은 채 양 끝이 치켜 올라갔고 콧등은 넓고 각이 있어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좁은 어깨에 비해 통견의 가사가 넓게 퍼져 있는데 그 사이로 가슴이 노출되는 부위는 매우 좁은 편이다. 가슴은 양감 없이 평판적으로 묘사하였고, 명치 부분을 가로지르는 내의 자락도 별다른 표현 없이 단순하다. 다만 내의가 한번 반전되면서 그 아래로 옷자락이 한 가닥 흘러나와 오른팔 손목 위를 지나 다시 아래로 늘어진다. 통견의 가사에 표현된 옷 주름은 얕고 간략한데, 대의의 양쪽 옷깃 부분과 오른쪽 어깨 위에 걸쳐진 편삼의 끝단만 깊게 조각하여 변화를 주었다. 편삼 위에 새겨진 옷자락도 얕게 새겼지만 한번 접히게 표현하여 번개문양처럼 되었다. 결가부좌한 다리 사이로 옷자락이 넓게 흘러나와 부채꼴처럼 펼쳐지는데, 오른쪽 발목에서 흘러내리는 군의의 끝자락만 깊게 깎고 나머지는 얕게 처리했다. 수인은 오른손과 왼손을 무릎에 올린 상태에서 오른손바닥은 정면을 향하고 왼손바닥은 위를 향한 채 양쪽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을 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오른손을 가슴 높이까지 드는 경우가 많으나, 여기서는 항마촉지인처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상태에서 손목만 꺾어 정면을 향하게 한 것이 특징인데, 이와 유사한 사례는 조각승 희장(熙臧)이 제작한 목조 아미타삼존불상의 본존 아미타불(1650년)이나 청허(淸虛)가 만든 거창 심우사 목조 아미타불상(1640년) 등의 수인에서도 드물지만 찾아볼 수 있다.
복장물이 없어서 정확한 조각가나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작은 크기의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내면적으로 분출되는 강한 존재감, 깊이 침잠한 사색적 분위기, 외면을 감도는 긴장감 등이 은은하게 표현되어 있어 조각 기법이 우수하다고 평가될 수 있다. 참고로 이 불상과 같이 심원사에 있었던 고려시대 목조 아미타불좌상(보물, 2008년 지정)은 서울특별시 은평구의 수국사로 이운(移運)되었다. 심원사가 위치한 보개산의 정상을 환희봉이라 불렀는데, 환희사라는 절 명칭은 이와 연관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불상과 같은 조형성은 대체로 17세기 중엽의 목조불상에서 지향되던 요소들이다. 따라서 불상의 제작 시기를 17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중부지방의 목조 불상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