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임금 정책은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1980년대까지 일관되게 추진되어온 임금 정책이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수출 주도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국제 경쟁력을 명분으로 더욱 강력한 저임금 정책이 강요되었다.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만한 제품 품질을 확보할 수 있는 기술과 생산경험이 일천했던 조건 하에서는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이 가격 경쟁력이었고, 한국은 이를 위해 생산임금을 최저 수준으로 묶어 놓는 것이 절실했다.
저임금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중요했다. 1953년 제정된 「노동법」은 이후 여러 차례 사용자의 권익을 신장하고 노동권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특히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 이후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자 정부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71년 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의 행사를 주무관청에 조정 신청하도록 규정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1973년 3월과 1974년 12월의 노동법 개악, 긴급조치에 의한 노동3권 박탈 등의 사법적 조치를 취했다.
또한 1970년대 들어 외국자본의 직접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외자기업 노동자의 노조결성과 노동쟁의를 크게 제약하는 「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저임금 정책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줄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노동자의 생계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이 추진되었다. 부족해진 식량증산을 위해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고미가 정책이 채택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저곡가가 기본 정책기조였다.
1960∼70년대 저임금 정책이 가능했던 구조적 요인 중의 하나는 이촌향도(離村向都)를 통한 대규모의 산업 예비군의 형성이었다. 산업화에 따라 농민층이 대거 도시와 공장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어 노동시장이 확대되면서 경쟁 또한 치열해진 것도 저임금이 구조화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는 이촌향도가 완화되어 농촌지역으로부터 노동력 공급이 줄어드는 1980년대부터 임금 인상이 확대되는 현상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이른바 ‘루이스(Arthur Lewis) 곡선’에 따라 농촌의 무제한적 노동력 공급 기능이 소멸되기 시작한 것이다.
임금 수준의 결정은 노사 간의 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측면도 강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한 것은 노동운동의 활성화에 따라 노사 간 힘의 관계가변화했기 때문이었다. 노동 생산성 상승 비율에 못 미치는 저임금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이 정부와 사용자 측의 압도적인 힘의 우세 속에 가능했었다면, 노동운동의 활성화로 노동계가 정부와 사용자 측을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이 임금상승의 중요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2000년대를 전후해서는 전반적 저임금 문제보다 양극화 현상에 따른 상대적 저임금 문제가 심각해졌다. 즉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고 있는 반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저임금이 고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