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문학계는 1950년대의 연속이자 단절로 특징된다. 1950년대의 문학계는 해방 공간의 격렬했던 좌우대립이 한국전쟁을 전후해 폭력적으로 종결되고, 우파진영의 독무대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은 문학계에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 영향으로 새로운 문학적 경향이 대두하게 되었다. 예컨대 1960년대에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와 프랑스의 실존주의가 앙가주망(engagement: 현실참여) 중심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는 1950년대가 전쟁의 폐허와 죽음의 체험을 통해 기존 가치관이 붕괴된 상황 속에서 고립된 개체의 실존 문제를 중심으로 실존주의를 이해했던 것과 분명하게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문학의 현실참여 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문학논쟁이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수많은 문인들이 참여해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1963년과 1964년에 걸쳐 진행된 김우종·김병걸과 이형기 사이의 논쟁, 1968년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을 들 수 있다.
그 시작은 1963년 김우종이 『동아일보』 1963년 8월 7일자에 「파산의 순수문학」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이 글에서 김우종은 당시 지배적 흐름이었던 순수문학이 “현실과 민중의 삶을 외면했다”고 비판하면서 순수문학과의 결별을 주장했다. 이어 김병걸은 『현대문학』 10월호에 「순수와의 결별」이란 글을 기고해 말로(Andre Malraux)와 사르트르 등 서구의 앙가주망 이론을 소개해 참여문학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이형기는 1964년 『현대문학』 2월호에 「문학의 기능에 대한 반성: 순수옹호의 노트」라는 글을 발표해 순수·참여논쟁이 이미 해방기에 끝났다고 주장하며 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했다.
이 논쟁을 계기로 순수문학론 중심의 1950년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흐름이 참여문학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논쟁은 이후 김현, 이호철, 홍사중, 장일우, 임중빈 등을 통해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는 방식으로 확산되었다.
순수·참여논쟁은 1967년 김붕구가 세계문화 자유회의 세미나에서 「작가와 사회」라는 글을 발표해 “앙가주망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데올로기로 귀착된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불붙게 되었다. 이에 맞서 임중빈은 작가가 사회와 절연될 수 없는 까닭에 작가의식은 역사의식, 시대정신과의 함수관계를 떠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순수참여 논쟁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68년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이었다. 이어령은 『조선일보』 1968년 2월 20일자에 「오늘의 한국문화를 위협하는 것」이란 기고문을 통해 참여론의 확대를 우려하면서 그것이 “문화를 정치활동의 예속물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김수영은 1주일 뒤 같은 신문에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라는 글을 기고해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는 4·19혁명을 통해 1950년대와 단절하고, 문학의 현실참여를 강조하며 강렬한 비판정신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고 평가된다.
이후로도 김병걸, 김양수 등을 통해 간헐적으로 지속되던 순수·참여논쟁은 1970년대 리얼리즘 논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