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황해도 장연 출생으로, 본관은 평산이다. 일본 후쿠시마고등상업학교[福島高等商業學校]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대학(American University)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43년 조선은행에 입행했으며, 18년간 재직하며 1956년 한국은행 조사부장을 맡아 1961년까지 재임했다. 1961∼1962년 주미 한국 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한 후 1963∼1964년에는 미국 라파에트대학교(Lafayette University) 경제학 강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964년에는 세계은행에 입행해 근무하다 1970년 교체 이사로 선임되었고, 이어 고문으로 1975년까지 재직했다. 15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이수해 미국 주류 경제학에 대한 이해를 높였고, 세계은행 근무를 통해 국제 금융질서를 경험한 것은 이후 한국에서 경제 관료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1975년 국내로 돌아와 청와대 경제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어 1978년까지 재임했고, 제12대 한국은행 총재로 취임해 1980년까지 활동했다. 1980년 5월 제28대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내각에 입성했으며, 같은 해 9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되어 경제수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제2차 오일쇼크와 중화학공업 중복 투자 등에 의해 심각한 경제위기가 도래했던 시기에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재임하며, 중화학공업 구조조정, 농산물 수입개방, 물가안정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안정화 정책을 추진했다.
경제회복을 위해 1970년대 이래 상당한 갈등관계에 있던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급했던 전두환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대폭 수용했다. 그는 경제기획원 장관으로서 1981년 대통령의 방미외교를 수행하면서 쌀 수입개방 등 대미 경제관계 정책추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82년까지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후 제18대 한국무역협회장에 취임하여 1983년까지 재임하면서 한일경제협회 고문, 한일협력위원회 상임위원, 외무부 정책자문위원, 세계무역센터협회 이사,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이사 등을 역임했고, 1983년에는 한독수교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부위원장, 서울올림픽 범민족 추진위원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83년에는 다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되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1986년까지 재직하는 동안 1984∼1985년에 걸쳐 국무총리 권한 대행을 맡기도 했다.두 번째 경제기획원 장관 재임 시기는 ‘3저 호황’ 직전 시기로써 제2차 오일쇼크의 충격을 벗어나 한국 경제가 새로운 고성장을 달리게 되는 과도적 시기였다. 원칙론자라는 평을 들을 만큼 꾸준히 긴축정책을 펼쳐 물가안정 등을 달성해 ‘3저 호황’까지의 과도기를 무난하게 관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농업에 대한 지원 축소 등 안정화 정책으로 인한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부총리 직에서 물러난 뒤 1986년에는 일해재단 부속 일해연구소(현 세종연구소) 초청 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동시에 1986∼1989년 전국은행연합회장을 맡았다. 이외에도 1986년 상사중재원 이사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범민족올림픽추진중앙협의회 부의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사장, 민정당 고문 등의 직책을 맡았고, 1989∼1991년에는 전국은행연합회 고문을 역임했다. 1990년 경제정책자문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봉명산업개발 주식회사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1999년 4월 5일 미국 워싱턴 D.C. 자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