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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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인물
해방 이후 상공부장관, 경제기획원장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관료. 경제인.
이칭
이칭
향서(香西)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8년
사망 연도
2010년
본관
강릉
출생지
평안남도 안주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상공부장관, 경제기획원장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관료. 경제인.
내용

1918년 평안남도 안주 출생으로, 본관은 강릉, 호는 향서(香西)이다. 1937년 평양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해 헤이스팅스 대학교(Hastings University)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1951년 한국은행 도쿄 지점장으로 경제관료 생활을 시작했고, 1953년부터 1957년까지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의 IMF 가입 과정에 참여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은행 조사부장을 맡았으며, 1960년에는 외자청장, 부흥부 차관을 지냈고, 한국은행 부총재를 거쳐 1961년 불과 43세의 나이에 제6대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되었다.

1962년 제18대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1963년 경제기획원장에 임명되었다. 경제기획원장 임기 후 20여 년 간은 민간인 신분으로 사회활동에 주력했다.

경제기획원장 사임은 불과 취임 한 달 만에 이루어져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임 이유는 스스로 “미국의 원조를 받아낼 자신이 없어서”라고 밝혔다. 당시는 경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제개발을 위한 원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였다.

당시 군정연장 문제로 한미 관계가 껄끄러운 상태에서 미국이 추가원조에 난색을 표했던 것이 사임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군정연장에 대한 반대의 의미도 있었다. 게다가 한국은행 총재 재직 당시 발생한 증권파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50억 원을 공급하라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었던 터라 이들과의 관계도 좋을 수 없었다.

이후 1965년 유엔한국협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7년 롯데제과 회장으로 취임해 경제계로 활동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기업 회장직을 오랫동안 유지하게 되면서 민간 경제인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80년대로 들어와 다시 공직 경력을 쌓게 되었다. 1981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부회장에 취임했고, 이어 제17대 무역협회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한미경제협력 위원장을 비롯해 유엔한국협회장,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81년에는 롯데제과 고문을 맡으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다시 관계로 복귀했다.

1982년에는 제15대 국무총리에 취임했는데, 경제계 인사로서 국무총리로 발탁된 것은 당시 심각했던 경제위기를 해결하고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던 전두환 정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곧바로 1982∼1985년 제15대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재임했다.

이후 다시 경제계로 돌아와 1982년 경영자총협회 고문, 1983∼1989년 전경련 고문, 1985년 대신증권 경제연구소 회장, 1989년 한국창업투자 회장과 호남석유화학 회장 등을 거쳤으며, 1989∼1993년 제19·20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직을 수행했다.

전경련 회장으로 취임한 것은 대기업 소유주가 아닌 경우로는 유일한 사례였다. 민간 기업의 회장직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소유주는 아니었기에 전경련의 대표로 나서게 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전경련이 이러한 예외적 결정을 하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1980년대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노사관계가 극심한 갈등을 보이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반감과 비판적 정서가 매우 강했다. 때문에 전경련은 대기업 소유주나 재벌 총수를 회장으로 내세우는 것보다 전문 경영인에 가까운 인물을 영입하게 되었다.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이후 현안을 원만하게 조정하고 무난하게 조직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재벌기업의 이해 대변에 주력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가 전경련 회장으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규제개혁이었다. 그는 자유시장경제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신념과 함께 “자본주의는 근본에 있어서 국민 모두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고 개인의 자유·창의력·능력 등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기에 공산주의 국가를 앞설 수 있는 것”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소신에 입각해 규제개혁을 적극 강조했고, 정부 또한 이를 대폭 수용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중등교육을 받고 도미 유학을 통해 고등교육을 이수한 후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관료생활을 시작해 해방 후 미국 유학과 연수를 경험한 관료들과는 구분되는 경력을 보여준다. 때문에 1950년대부터 미국의 자유주의적 논리에 상당한 친화성을 보여주었다. 전경련 회장 재임 시 규제개혁에 앞장선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전경련 회장에서 물러난 후에는 전경련 명예회장으로추대되었고, 아산재단 이사, 한국국제교류재단 운영자문위원, 한중우호협회 고문, 안중근 의사 사업추진위원회 고문, 사회복지사업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2010년 6월 3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이재원, 나남, 2007)
『한국경제 100년 과연 어떤 일이』(장동학, 무한, 2002)
『제2공화국과 장면』(이용원, 범우사, 1999)
『아산 정주영과 나』(아산복지사회사업재단, 1997)
「유창순 전 국무총리 별세」(『매일경제』, 2010.6.3.)
집필자
황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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