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빈민은 도시 지역 거주 빈민이라 할 수 있기에 도시화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도시화 현상은 일제강점기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도시 빈민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근대 이후의 도시화는 주로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과 관련되며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 근대 자본주의 유입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일제강점기 도시빈민은 주로 토막(土幕)에서 생활했기에 ‘토막민’이라 불렸다. 토막민 성립 시기는 대체로 1919년 이후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는 토막민을 “하천부지나 임야 등 관유지·사유지를 무단 점거해 거주하는 자”라고 규정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조선』 1932년 10월호에 따르면, 1930년 현재 서울근교의 토막촌은 경성부 고시정(현 후암동)과 도화정, 고양군 신당리와 북아현리 등에 형성되어 있었고, 1940년 말 경성부 사회과 자료에 의하면, 공식적인 토막민의 숫자는 1만 6,344명, 비공식적으로는 3만 6,000여 명에 이르렀다.
지속적인 토막민의 증가로 경성부는 교외지역인 홍제정·돈암정·가현정 등에 토막 수용지를설정해 부내에 산재하는 토막민을 수용했으며, 이는 이후 달동네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시빈민은 해방 이후 폭증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해외로 이주했던 수백만의 사람들이 귀환하면서 상당수가 도시지역에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분단으로 인해 월남하는 사람이 급증하면서 서울은 100만 명이 넘는 거대 도시가 되었지만, 이를 감당할만한 경제적 토대는 매우 취약했다.
이에 주택, 식량 문제를 위시한 다양한 도시문제가 대두되었고, 도시로 인입된 상당수의 주민들은 빈곤 계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돈암동 등지에는 「혈거부족」이라는 소설이 나올 정도로 토굴을 파고 생활하는 도시빈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또 한 번 도시빈민이 폭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쟁을 통해 북한지역에서 대거 피난민이 몰려들었고, 별다른 연고가 없던 이들은 주로 도시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규모의 도시빈민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 추진과 산업화 이후였다. 1960년 244만 명에 불과했던 서울 인구는 1980년대 초반 1000만 명을 넘어섰다. 불과 20여 년 만에 인구가 4배 정도 폭증한 셈이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정도의 차만 있을 뿐 다른 지역의 대도시에서도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1970년대 중반 전체 인구 중 도시 거주 비율이 50%를 넘어서게 되었다. 산업화에 따른 이촌향도(離村向都)가 도시화의 주된 원인이었고, 이들 이촌향도민들이 도시빈민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서울이 초고밀도 도시가 되어가면서 다양한 문제가 불거지자 안양, 성남, 부천 등의 위성도시가 들어서게 되었고, 도시빈민은 수도권 전체로 확산되었다. 특히 광주대단지로 출발한 성남시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1970년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에 거주하던 도시빈민을 반강제적으로 이주시킨 광주대단지는 구릉지대에 천막만 설치해 놓아 아무런 생활기반이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주택부지 분양과 관련된 서울시의 정책혼선으로 주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폭발해 대규모 대중봉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불리는 이 봉기는 도시화와 도시빈민 문제가 집중되어 발생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로도 도시화와 이촌향도는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도시빈민 문제 또한 여전했다. 이에 다양한 도시빈민 운동이 발생했고, 1980년대 이후 도심지 재개발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철거반대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계동, 사당동 등은 대표적인 철거반대 투쟁이 전개된 지역이었다.
1998년 금융위기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 등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화되면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 도시 중산층이 감소하고, 도시빈민이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