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촌야도 현상은 정치학자 윤천주(尹天柱)가 최초로 사용한 용어로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원 총선거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 현상은 1970∼80년대 지역주의가 대두하기 전까지 한국의 가장 특징적인 선거양상이었다.
1958년 총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126석, 야당인 민주당은 79석을 차지했다. 선거결과 민주당이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자유당으로서는 좋지 않은 결과를 남겼다. 이 선거는 그 내용이 기존의 선거와 매우 달라 눈길을 끌었다. 즉 도시지역에서는 야당이 압승을 거둔 반면, 농촌지역에서는 여당인 자유당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16개 선거구가 있었던 서울에서는 14개 지역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당선되었고, 여당인 자유당은 서대문 을구 한 곳에서만 당선되었다. 제2의 도시인 부산에서도 민주당은 10곳 가운데 7군데를 석권하는 등 대도시는 야당이 휩쓸었다. 여당의 거물이었던 이기붕이 서울을 포기하고 경기도 이천으로 선거구를 옮길 정도로 도시의 야당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1960년대 들어서도 여촌야도 현상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는 특이한 투표구도가 만들어졌다. 즉 충청도 지역을 기준으로 이남지역은 박정희 후보가 우세한 반면 이북지역에서는 윤보선 후보가 더 많은 득표를 했다. 이를 두고 당시 언론에서는 ‘제2의 38선’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 선거는 여촌야도 현상을 잠시나마 교란시킨 선거였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를 제쳤다는 점에서 여촌야도 현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공화당과 박정희는 총선과 대선을 막론하고 서울에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여촌야도 현상은 한국사회의 변화와 밀접히 관련된다. 그 변화의 주된 내용은 도시 부문의 성장을 배경으로 했다. 여촌야도 현상이 처음 나타난 1950년대 말 무렵 한국사회는 전통적 농업사회에 가까운 상태이기는 했지만, 도시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고 있었다.
1950년 서울의 인구는 143만 7,670명이었는데, 1960년에는 244만 5,402명으로 증가해 10년 만에 무려 100만 명 이상이 늘어났다. 전쟁의 여파로 월남 피난민과 함께 농촌지역의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이동한 것이 주요 이유였다. 이후 서울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1970년 552만 5,262명, 1980년 835만 616명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 이후 1950년대 한국사회는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 영향력이 급속도로 팽창한 시기였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가 한국의 지배적 가치가 되어갔는데, 대규모로 확대된 공교육 체제가 주요한 확산 통로였다. ‘국민학교’ 취학률이 90%를 넘었고 중고등학교도 대폭 늘어나 이전 시기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학생층이 두터워졌다. 서울을 위시한 도시지역에서 이러한 변화의 영향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4·19혁명이다. 4·19혁명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첫째, 도시 중심, 둘째, 학생 중심, 셋째,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즉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건 도시의 학생 시위가 권력의 붕괴를 불러왔던 것이다. 이는 이전 시기에는 나타날 수 없었던 현상이다.
도시지역은 근대적, 서구적 가치와 이념, 관습과 문화가 집중적으로 전파되었던 지역이었기에 독재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매우 강하게 형성되었던 반면농촌지역은 전쟁과 농지개혁을 거치면서 보수화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농촌의 정치적 동원을 주도했던 좌익세력이 소멸되고 농지개혁을 통해 자작농화 된 농민들은 기존 질서 내로 체제내화 되는 경향이 강했다. 이렇게 1950년대 전후 농촌의 보수화를 ‘재전통화(Re-traditionaliza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농촌과 도시의 차이가 여촌야도 현상을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여야 간 양당 구도가 정착되었다는 점이다. 1958년 선거 이전까지는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어 정당정치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제헌의회 선거는 200명 중 86명, 제2대 총선에서는 79명, 3대는 202명 중 70명이 무소속이었다.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독립촉성국민회가 정식 정당이 아니었음에도 55명의 당선자를 배출해 정당 중 최다 의석을 확보한 한국민주당(29석)의 두 배 가까이나 되었다.
그러나 1958년 제4대 총선에서는 전체 232석 중 무소속은 26명에 불과한 반면 정당 소속은 자유당 125석과 민주당 79석을 합쳐 무려 204석으로 명실상부하게 양당 체제가 확립되었다. 양당 외에 당선된 사람은 통일당 소속 2명이 전부였다. 양당 체제가 나타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55년 민주당의 창당이었다. 분산되어 있던 야당 진영이 단일 정당으로 통합됨으로써 선거가 여야 구도로 단순화되었다. 이후 선거에서 무소속이 대규모로 나타난 적은 없었다.
여촌야도 현상은 1960∼70년대 급속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더욱 강화되고 고착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를 결정적으로 교란했던 현상이 지역주의 정치의 등장이었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는 한국 정치역사상 처음으로 지역구도가 중요한 투표 양상으로 나타났다.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신민당 김대중 후보는 ‘대중경제론’을 주장했는가 하면 예비군제 폐지 등과 같은 공약을 내세워 돌풍을 일으켰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 후보 측의 대응전략 가운데 하나가 지역 대립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당시 국회의장이던 공화당의 이효상(李孝祥)이 대구 유세에서 지역 색을 조장하는 발언을 한 것을 계기로 5월의 총선 과정에서도 다시 지역 색을 강조하는 선거전이 벌어졌다.
이후 한국의 선거는 지역구도가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는 여촌야도 보다 더욱 중요한 선거양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