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종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1년 5월 23일
사망 연도
1919년 3월 22일
출생지
경상남도 거창군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석종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에서 전개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2일 거창읍 장날에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거창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체포되자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는데,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던 일제 경찰의 무차별 총격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용산리 출신으로, 1871년 5월 23일 출생하였다.

주요 활동

거창 지역에서의 3 · 1운동은 가북면의 김병직(金秉直)과 가조면의 어명준(魚命俊)에 의해 계획되었다. 이들은 3월 20일 가조면 장기리 시장의 장날을 기회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20일 오후가 되자 김병직과 어명준은 장터에 모인 4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고, 용산리의 헌병 분견소원들은 시위를 막기 위해 출동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시위대를 빠져나와 헌병 분견소로 달려가 유리창과 서류 및 기물을 모두 파괴하였다. 헌병 주재서원들이 시위 가담자 60여 명을 체포해 오자, 두 사람은 이들과 힘을 합해 일본 헌병대와 난투극을 벌였으나 체포되어 3월 21일 거창읍에 있는 헌병 분대로 압송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마을의 유지들은 3월 22일 거창읍 장날에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오문현(吳文鉉) · 신병희(愼炳禧) · 어명우(魚命佑) · 어명철(魚命喆) · 이병홍(李秉洪) · 김호(金濩) 등 6인을 대표로 선출하였다.

이들은 가북면과 가조면을 비롯하여 인근의 마을 주민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었고, 3월 22일 아침 거창 주둔 일본군 헌병대는 김채환(金采煥) · 김호 · 오문현 · 어명철 · 최영순(崔榮淳) 등을 체포하였다.

오후 2시 30분경 3,00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은 몽둥이를 들고 장기리 만도정(晩嶋亭) 앞에 ‘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을 세우고, 주동 인물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시위대가 사포현(沙浦峴)에 이르자, 길을 막고 있던 일제 헌병은 공포를 쏘며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며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이석종(李錫宗), 신문구(愼文九), 배이권(裵二權), 조이록(曺二祿) 등 4인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건회 외, 『국내 3.1운동Ⅱ- 남부』(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국가보훈처, 1971)
이용락, 『삼일운동실록』(금정, 1965)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