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주가 말년에 진호의 『예기집설(禮記集說)』에 의문을 품고 십수 년 동안 연구하여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서 펴낸 책이다. 그는 『예기집설』의 편성을 따르지 않고 6권으로 분류하여,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고서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는 방식을 택했다.
홍석주(洪奭周, 1774∼1842)는 어렸을 때 받은 사서(四書)와 시 삼백(詩三百) 편의 주자(朱子)의 전주(傳註)와 상서(尙書) 채씨전(蔡氏傳)이 마음에 흡족하지 못했고, 조금 성장해서 접한 소대씨기(小戴氏記)와 진호(陳澔, 1261~1341)의 『예기집설』도 그 소루함과 흠결을 애석하게 여겼다. 관각을 출입하면서 주소(注疏) 이하 제유(諸儒)의 설을 반복해 궁구한 그는 『상서보전(尙書補傳)』을 지은 후에, 십수 년 동안 예를 연구하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홍석주는 『예기집설』이 본래 30권이었으나, 그 뒤 10권으로 합병되기도 한 편성을 따르지 않고 모두 6권으로 나누었다.
권1에는 곡례·단궁·왕제, 권2에 월령·증자문·문왕세자·예운·예기, 권3에 교특생·내칙·옥조·명당위·상복소기, 권4에 대전·소의·학기·악기·잡기, 권5에 상대기·제법·제의·제통·경해·애공문·중니연거·공자한거·방기, 권6에 표기·치의·분상·문상·복문·간전·삼년문·심의·투호·유행·관의·혼의·향음주의·사의·연의·빙의·상복사제 등으로 구성하였다. 마지막에는 독례(讀禮)라는 항목이 있는데, 예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예기』는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초기까지의 유가들이 고대부터 그 당시까지의 많은 예제를 모아서 이를 해석하고 편집한 예서이다. 보통 한나라 선제 때 대성(戴聖)이 편찬한 『소대례기(小戴禮記)』를 가리킨다.
『예기집설지의』는 서두에 1838년(헌종 4) 9월에 쓴 서문이 붙어있다. 본문의 내용은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고서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는 형태이다. 권1의 「곡례」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진씨의 해석에 의문을 품은 부분의 『예기』의 경문을 먼저 기록하고, 이어서 그에 대한 진씨의 해석을 ‘진씨위(陳氏謂)’라 하여 약술한 다음에, 홍석주 자신의 견해를 ‘여위(余謂)’를 시작으로 서술하였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은 ‘군자의 행례는 변속(變俗)을 구하지 않는다.’는 문구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실었다.
다음 단락도 『예기』의 경문을 싣고 이어서 ‘진씨집설위(陳氏集說謂)’라 시작하여 진호의 설을 기록하고서, ‘절공미연(窃恐未然)’이라 하여 진호의 해석이 옳지 않음을 바로 지적하고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였다. 이어지는 단락은 진씨집설에서 해석하는 곡례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데, 말미에는 세주로 ‘이하독대기속지의(以下讀戴記續志疑)’라 썼다. 이 단락과 다음 단락은 『대례기』를 읽고서 논의를 전개해 이 지의에 이어붙인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홍석주는 『예기집설』을 주자 경학의 적전으로 보기는 하지만, 그에 나타나는 의문이나 문제점을 짚어가면서 관련 논의를 형식에 구애하지 않고 보충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예의 쇠퇴와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폐해를 개선하고자 말년에 이 책을 지은 홍석주의 예의식과 경세관을 시대의 발전방향과 관련지어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