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9년(숙종 45)에 8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제9차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이때에 나고야[名古屋]를 지나는 9월과 10월에 오와리[尾張]번의 유학자 아사히나 분엔(朝比奈文淵, ?~1734)이 이곳으로 찾아와 통신사들과 함께 필담과 창화시를 주고받았는데, 이 책은 이들 간의 주고받은 필담 내용이다. 이후 1720년에 황도서림에서 출판하였다.
아사히나 분엔은 조선통신사가 교토로 오가는 길인 1719년 9월 16·17일 그리고 10월 25일 나고야에서 조선통신사를 찾아가서 필담창화를 하였다. 이후 그는 이를 기록하여 1720년(숙종 46) 야수다[安田万助]에게 판각하게 하여 교토의 황도서림(皇都書林)에서 간행하였다.
목판본으로 2권 1책이며, 표지에는 ‘화한창수(和韓唱酬) 봉도유주(蓬島遺珠)’라는 제첨이 있다. 사주단변에 반곽은 9행 18자이고, 상흑어미에 책 크기는 세로 23.0㎝이고, 가로 16.5㎝이다. 간기에는 ‘향보오 경자년(1720) 정월길진 압소로통류마장동강팔정(享保五庚子年正月吉辰押小路通柳馬場東江八町)’으로 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도서관장서지인(朝鮮總督府圖書館藏書之印)’의 장서인이 있다. 조선총독부 소장 도서에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아사히나 분엔의 성은 조(朝), 자는 함덕(涵德), 호는 현주(玄洲), 옥호(玉壺)로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에게 배웠으며 오와리 나고야번에서 일하였다. 1719년 동문인 기노시타 난고[木下蘭皐]와 함께 통신사 일행과 시문과 필담을 나누었는데 이 책은 그 시문과 필담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전후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편은 1719년(숙종 45) 9월 16·17일 아사히나와 제술관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을 비롯하여 정사 서기 경목자(耕牧子) 강백(姜栢), 종사관 서기 국계(菊溪) 장응두(張應斗), 의원 서초(西樵) 백흥전(白興銓) 등과 필담한 내용이며, 후편은 같은 해 10월 25일 아사히나와 신유한 그리고 강백, 장응두, 백흥전 외에 부사 서기 소헌(嘯軒) 성몽량(成夢良)도 참여하였다. 신유한의 『호북첩(湖北帖)』발문, 장응두와 백흥전의 『수축(壽軸)』제문 등이 실려 있다. 말미에 일본승 하야시 호이[林惠]가 신유한과 성몽량에게 편지로 보낸 시와 이에 대한 화운이 실려 있다. 필담 내용은 서예법, 신선술, 시체(詩體), 서물(書物), 서첩, 탁본, 관복, 어린이의 머리모양, 종이, 금조(琴調), 먹 등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9월 16·17일의 창화는 조선에서 교토로 가는 길에 나고야에 들렀을 때 수창한 내용으로 여독으로 힘든 신유한은 아사히나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은 반면 아사히나는 다음날 아침에 들러 만남을 가지려 노력하였다. 10월 25일 귀국길의 창화에서는 신유한이 다음날 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새 같이할 정도로 교류를 나누어 신유한의 태도 변화가 나타난다.
이 책의 내용은 이 사행을 기록한 신유한의 『해유록(海遊錄)』과 기노시타의 『객관최찬집(客館璀粲集)』을 함께 보면 당시의 정황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1719년(숙종 45) 나고야에서 통신사의 교유를 매우 상세히 기록하여 신유한의 『해유록』 이해를 심화시켜 줄 뿐 아니라, 일본측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어 당시 한일교유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기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