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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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인물
해방 이후 순심중학교 교장, 성의중학교 교감, 근화여자중학교 교감 등을 역임한 교육자. 문필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1970년
본관
안동(安東)
출생지
전라남도 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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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순심중학교 교장, 성의중학교 교감, 근화여자중학교 교감 등을 역임한 교육자. 문필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06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고창군수, 장성군수, 무안감리를 지낸 김성규(金星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호는 야인(也人)이다. 1926년 12월 여주 이씨 집안 출신의 이신영(李信榮)과 결혼하여 슬하에 7남매를 두었다. 한학을 배우고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대전중학교,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수학했고, 중국 북경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해서 언어학을 공부했다.

중국 유학시절 대학 도서관 사서로 있던 마오쩌둥과 친교를 갖고 공산당에 입당하여 홍군에 가담하였는데, 이 사실을 부친이 알고 강제로 귀국시켰다고 한다. 맏형 김우진(1897∼1926, 한국의 신극 창시자)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1929년 현해탄에서 가수 윤심덕과 함께 동반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 그는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1935년 도쿄의 한 책방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에 감동을 받고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오기선(吳基先) 신부의 서재에서 토마스 데 아퀴노의 『가톨릭과 경제문제』라는 책을 읽고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1936년 목포에서 가족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1937년에는 프란치스코 제3회에 가입하였으며, 그 뒤 광주교구의 섭외 일을 보다가 1940년 장성으로 이주하였다. 장성으로 이주한 후 신앙생활을 하며 장성성당을 건립하였고, 해방 이후 자신의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분배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광주교구에 헌납하였다.

1948년 대구로 이주하여 왜관의 순심중학교 교장, 김천 성의중학교 교감을 역임하였고, 6·25전쟁 중에는 『가톨릭 시보』의 편집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경주 근화여자중학교 교감으로 재직하기도 하였지만, 1955년부터는 문필생활에만 전념하여 여러 번역서와 저술을 남겼다. 1966년에는 『가톨릭 청년』지에 ‘동방문화연구기구의 창설을’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유학과 불교를 우리 편에서 연구하는 위원회를 구성함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고, “국산 외국인이 되지 말자!”(勿爲國産外國人)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마음이 늙어서 죽은 사람은 파묻지도 말라.”며 ‘늙은 젊은이’를 자처하였고, 경주(慶州)를 좋아하여 매주 그 곳의 고분을 방문하고 그 앞에서 즉흥시를 읊기도 하였다고 한다.

1967년 한쪽 눈을 실명한 이후에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고, 1970년 1월 6일 고혈압으로 사망하여 대구 범어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주요 저서로 『동서저편』(성바오로출판사, 1971), 『민속과 서학』(유고집, 성바오로출판사, 1971), 그리고 번역서로 『레지오 마리에 직무수첩』(광주, 1956), 『동서의 피안(彼岸)』(가톨릭출판사, 1961), 『동방문화와 공교(公敎)』(분도출판사, 1965), 『내심낙원(內心樂園)』(성바오로출판사, 1966)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야인 김익진」(김화영, 『경향잡지』95-2, 2003)
「지성 메마른 교회의 청량한 바람.. 야인 김익진」(『가톨릭뉴스 지금여기』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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