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렬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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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조선후기 하위지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이칭
이칭
창렬사(彰烈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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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조선후기 하위지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개설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인 하위지(河緯地, 1412∼1456)를 제향하기 위해 1804년(순조 4) 안동부 서후면 교리에 창렬사(彰烈祠)를 건립하여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1809년(순조 9)에 창렬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824년(순조 24)에 사림들의 중의(衆議)로 서후면 이개리(耳開里)로 이건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89년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원래 위치인 현 위치에 복설되었다. 현재 매년 음력 9월 2일에 향사(享祀)를 봉행하고 있다.

내용

하위지는 본관이 진주, 자는 천장(天章), 호는 단계(丹溪)이다. 1435년(세종 17) 생원,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 동복현감, 집현전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주모자의 한사람으로 국문을 받고 극형을 당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서원은 외삼문, 강당, 서재, 내삼문, 사당, 전사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삼문에는 ‘유의문(由義門)’, 강당에는 ‘숭렬당(崇烈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5량가(五樑架) 팔작기와집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로 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쌍여닫이 사분합문을, 후면에는 쌍여닫이판문을 달았다. 좌측 협실에는 ‘영모재(永慕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서재에는 ‘성인재(成人齋)’, 사당에는 ‘창렬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성인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좌측 협실에는 외여닫이문을, 나머지는 쌍여닫이를 달았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측면에는 풍혈판이 붙어 있다.

서원 관련 기록으로는 창렬사에 하위지의 위패를 봉안할 때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 작성한 「창렬사단계하선생상향축문(彰烈祠丹溪河先生常享祝文)」, 1824년 7월에 창렬서원을 이건할 때 서경보(徐耕輔)가 지은 「창렬서원이건상량문(彰烈書院移建上樑文)」, 하위지의 증직 및 시호를 받은 것을 기념하여 작성한 「창렬사증직고유문(彰烈祠贈職告由文)」·「금상어제창렬사사제문(今上御製彰烈祠賜祭文)」, 창렬사를 중수하면서 감사(監司) 이지연(李止淵)이 작성한 「창렬사우중수기(彰烈祠宇重修記)」, 신유년 5월에 창렬사를 수리하기 위해 진주하씨 후손들이 뜻을 모아 계를 결성한 뒤 작성한 「단계하선생창렬사수계안(丹溪河先生彰烈祠修契案)」 등이 있다.

참고문헌

『교남지(嶠南誌)』
『단계유고(丹溪遺稿)』
『모산선생실기(茅山先生實記』
『정재집(定齋集)』
『경북서원지』(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 경상북도, 2007)
유교넷(www. ugyo.net)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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