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崔致遠)은 신라 말의 문인, 관료, 유자로 대표적인 육두품 지식인이었다. 857년(헌안왕 1) 경주에서 태어나 868년(경문왕 8) 12세로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874년 당에서 빈공과에 합격한 후 관료 생활을 하다 895년 귀국하였다. 당에서도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귀국 후 신라에서 관료로 활동하며 당에 보내는 국서를 작성하기도 하고 비문(碑文) · 기(記) · 찬(讚) 등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많은 문장을 지었다. 유, 불, 도 삼교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교 관련 시문도 많이 지었다. 894년(진성여왕 8)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올리는 등 신라 사회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으나 골품제라는 신라 사회의 한계 속에서 그의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결국 최치원은 난세를 한탄하며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만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며 승려들과 교류하였다. 말년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가야산 해인사지(伽倻山 海印寺誌)』에 수록된 가야산 해인사의 옛 기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희랑대덕군(希朗大德君)이 여름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는데, 나는 적(賊)들을 막아 내느라고 청강할 수가 없었다. 이에 한 번 읊조리고 한 번 노래하되, 5측(側) 5평(平)을 써서 10절을 지어 장(章)을 이루어서 그 일을 기린다. 방로태감 천령군태수 알찬 최치원[希朗大德君 夏日於伽倻山海寺 講華嚴經 僕以捍虜所拘 莫能就聽 一吟一咏 五側五平 十絶成章 歌頌其事 防虜太監 天嶺郡守 遏粲 崔致遠]”
최치원이 희랑에게 지어준 시는 10수였으나, 현재는 6수만 전하고 있다. 희랑에게 준 이 시는 『해인사지』 외에도 최치원의 문집인 『고운집(孤雲集)』에도 증희랑화상(贈希朗和尙)이라는 제목으로 동일한 6수가 수록되어 있다.
「증희랑대덕(贈希朗大德)」은 최치원이 희랑에게 준 시이다. 희랑은 후삼국기 신라의 대표적인 화엄종 승려로, 해인사에 있으며 최치원과 교류하였다. 후삼국 시기 해인사 승려들은 견훤을 지지하는 남악파(南岳派)와 왕건을 지지하는 북악파(北岳派)로 나뉘어 있었다. 관혜(觀惠)가 견훤을 지지하였다면, 희랑은 북악파를 대표하는 승려로 고려 태조 왕건의 귀의를 받았다. 해인사에서 열린 희랑의 화엄경 강설을 기려 쓴 시로, 희랑의 높은 화엄학의 경지를 칭송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야산 해인사지』에 의하면 894년(진성여왕 8)에 작성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