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용신설화」는 백제와 후백제의 왕계를 물의 용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는 설화이다. 『삼국유사』의 「무왕」조와 「조룡대 설화」, 「견훤 설화」 등에서 용신이 등장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무왕의 탄생에서는 용신의 현현, 백제의 멸망에서는 용신의 최후, 그리고 견훤의 실패와 좌절에는 용신의 후예로서 부정되는 이야기가 그려지는데, 용신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적 유대감과 지속 의지 및 복원에 대한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해석된다.
문헌 전승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 설화」가 있다. 백제의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장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못의 용과 교통하여 장을 낳았다. 장은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어릴 때는 서동(薯童)이라고 불리었고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백제 무왕의 부계가 용이었으므로, 백제 왕계가 용신 계통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부여 지방의 대표적인 역사‧지명 전설로 「조룡대 설화」 역시 이와 관련된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수호신 용이 나타나 방해하자 소정방이 말을 미끼로 삼아 용을 잡았다. 이때 용을 잡은 밧줄 자국이 조룡대 위에 남아 있다는 것이 전설로 전해진다. 나라의 쇠락에 대한 적극적 저항 의지를 수호룡으로써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백제의 멸망과 용신의 최후를 연결하는 내용으로 호국룡(護國龍) 관념을 이해하게 한다.
용신의 모습은 후백제의 견훤(甄萱)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光州) 북촌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라고 하여 그대로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찾아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부터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는 내용이다. 용이 큰 지렁이[地龍]으로 바뀌고 지룡의 정체가 드러난 점은 이후의 일정한 왜곡의 결과라 할 수 있으며, 견훤의 탄생 이야기의 근저에는 용신을 섬기는 수부지모(水父地母)형의 신화적 틀이 작용하고 있다.
한편 구전 설화에서는 백제를 건국한 인물에 신성성을 더하는 대목이 있다. 가령 「위례성의 우물」 설화에서는 온조(溫祚)라는 인물이 비류와 헤어져서 위례성의 우물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용으로 둔갑시켜 수로를 따라서 자신의 좌정처를 정하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온조가 우물을 통해서 용으로 출타하고 그곳에서 특정한 행위를 하면서 새로운 건국을 준비하는 모습이 발견되는데, 문헌 설화에 보이는 용신 설화의 숭앙(崇仰)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마지막의 결말에서 비류와 소서노 등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아 죽은 것은 전형적인 전설의 면모라 할 수 있다.
용신은 호국이나 호법, 혹은 퇴치의 대상으로 인식되지만, 백제의 경우는 집단 의식과 관련되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백제의 흥망성쇠와 용신이 함께 한다는 점에서 그 신앙적 믿음과 이를 둘러싼 집단 존속의 의지가 나타난다. 무왕의 탄생에서는 용신의 현현, 백제의 멸망에서는 용신의 최후, 그리고 견훤의 실패와 좌절에는 용신의 후예로서 부정되는 이야기가 그려지면서, 용신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적 유대감과 지속 의지 및 복원에 대한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혼란 속에서 구세주를 기다리는 미륵사상과의 관련성이 주장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