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강가단은 16세기 중반 이후 경상도 예안의 분강에서 이현보(1467∼1555)를 중심으로 시회를 즐기고 뱃놀이를 하면서 강호의 즐거움을 누린 일군의 시가활동을 말한다. 이현보는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고향인 분강에서 이해, 이황, 이문량, 이중량, 황준량 등과 뱃놀이를 하면서 〈어부가〉를 산정하고, 놀이를 통하여 문화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면서 강호가도를 수립하였다. 이현보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들이 이러한 풍류를 이었으며, 17세기 이후 18세기 초반까지 〈어부가〉 현장의 흥취와 분강가단의 풍류를 수용하는 것으로 김응조, 권두경 등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현보가 한양에서 40여년의 벼슬살이를 정리하고 고향 예안으로 돌아간 뒤에 주위의 승경을 바탕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분강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강호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면서 분강가단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분강가단의 기본은 이렇듯 열친(悅親)과 유완(遊玩)에서 비롯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선친에 대한 그리움과 형제간의 우애 등으로 확산되기도 하였다. 이현보가 벼슬에서 물러나 분강에서 지낸 1542년부터 1555년까지 14년을 1차로 하고, 이현보가 기세한 뒤 16세기 후반까지 이현보의 아들들이 계승하여 선친에 대한 그리움과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 시기를 2차로 설정할 수 있고, 1662년 김응조 중심의 분강 뱃놀이와 1718년 권두경 중심의 뱃놀이를 분강가단 풍류의 후대 수용이라 할 수 있다.
분강가단은 1차로 이현보를 중심으로 이해, 이황, 이문량, 이중량, 황준량 등이 참석하였으며 농암, 애일당, 분강, 점석 등의 구체적 지소를 중심으로 대체로 3, 6, 9월의 15일경에 모임을 가졌으며 한시를 창수하고 국문시가를 가창한 것이다. 이현보 사후 아들들을 중심으로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과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기 위하여 빈번한 모임을 가졌고, 17세기 이후 〈어부가〉 현장 흥취의 수용이라는 점에서 지역의 문사들을 중심으로 풍류를 이어갔는데, 1662년 김응조를 중심으로 한 분강 뱃놀이, 1718년 권두경을 중심으로 한 뱃놀이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분강가단은 집단적인 시가 활동의 전개로 영남지역에서 가단의 위상을 확보하였고, 사람과 자연과 노래가 하나의 도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어부가〉 산정과 같은 국문시가의 정리를 포함하여 놀이를 통하여 생활문화를 조절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분강가단은 이현보를 중심으로 한 시가 활동에서 그 자손들과 후학들에게 이어지면서 〈어부가〉 향유를 기본으로 하면서, 열친과 유완, 선친에 대한 그리움과 우애 등으로 지속되었으며 향촌 생활문화의 일부로 문화조절의 역할까지 맡았다는 데에 시가사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