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가단 ()

고전시가
개념
16세기 중엽 이후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시조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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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세기 중엽 이후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시조동호회.
개설

가단은 특정한 시기에 우리말 노래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활동을 전개한 집단이다. 영남가단은 16세기 중엽 이후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동일한 신분의 일정한 구성원이 일정한 공간을 바탕으로 시가 활동을 한 집단을 가리킨다. 영남가단은 명칭을 문제 삼을 수도 있으나, 16세기 중반 이현보(李賢輔, 1467∼1555)를 중심으로 예안 지역의 분강가단(汾江歌壇)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영남지역의 시가 활동을 가리키는 범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현보가 죽은 뒤에는 그 자식들을 중심으로 분강가단의 활동이 이어졌고, 17세기와 18세기 초반까지 지역의 사대부들에 의해 〈어부가〉의 풍류를 이어가는 활동이 전개되었다. 같은 지역의 이황, 영우지역의 조식(曺植)·노진·강익, 상주의 김우굉, 함양의 조식(曺湜)·강익, 문경의 채헌 등의 시가 활동을 영남가단에 포괄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16세기 중엽 이현보의 분강가단 활동에서 시작하여, 중엽 이후 조식과 노진, 강익 등을 중심으로 한 영우지역의 가단, 김우굉 등이 활동한 성주·상주 지역의 가단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18세기 후반의 채헌의 석문정을 중심으로 한 석문정시가단은 구성원, 공간, 활동 등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내용

1542년 76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이현보는 분강·농암·점석 등의 지연 지소와 애일당·긍구당 등 직접 구축한 공간을 배경으로 시회를 마련하고 뱃놀이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이 과정에서 〈농암가〉 〈생일가〉 등의 시조를 짓고 〈어부가〉를 산정하였으며, 사람과 자연과 노래가 하나의 도를 이루도록 하여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수립하였다. 즉 이현보가 중심이 된 분강가단은 구체적 지소와 함께 〈어부가〉의 산정과 강호가도의 수립이라는 중요한 성과를 낳고 결과적으로 향촌사회의 문화조절까지 이룬 것이다.

이현보가 죽은 뒤에는 그 자식들을 중심으로 분강가단의 활동이 이어졌다. 자식들은 어버이의 뜻을 지키면서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여 가문을 중심으로 문화의 전승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이숙량의 〈분청강호가〉가 제작되었다. 분강가단의 활동에 참여하기도 한 이황, 주세붕 등은 〈도산십이곡〉 〈오륜가〉 등의 작품을 남기면서 풍류와 도학이 한데 어우러지는 경지를 추구하였다.

분강가단의 풍류는 16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개별적으로 수용되기도 하였지만, 17세기 후반의 김응조, 18세기 초반의 권두경을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수용되면서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6세기 영우지역에서는 조식(曺植, 1501∼1572)을 정점으로 노진(1518∼1578), 강익(1523∼1567) 등이 개별 시가 작품을 짓기도 하고 여러 차례 산수자연에서 노닐면서 “노래하고 읊조리며” 시가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된다. 또한 성주에 연고를 두고 상주에 정착한 김우굉(1524∼1592)이 〈개암십이곡〉을 짓기도 했다. 한편 김우용 등이 1566년 함양에서 조식(曺湜, 1526∼1572), 강익 등과 “서로 화답하며” 노래를 부르는 모임을 가진 사실이 확인되면서 가단의 형성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상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중 김우굉, 김우용 등은 성주, 상주 등에 연고를 두고 있어서 지역의 교차를 통한 가단의 형성 가능성도 제기해 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는 문경을 중심으로 채헌(蔡瀗, 1715∼1795)이 석문정(石門亭)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채시유 등의 일가와 김명우, 이중목, 이천섭, 유일춘 등과 시가 활동을 하면서 〈석문정가〉와 〈석문정구곡도가〉 같은 가사를 직접 짓고, 〈석문가〉 〈세심대가〉 〈조대가〉 등 8수의 시조를 남겼다. 석문정시가단의 시가 활동은 실천적 삶을 통한 체험미학의 터득과 생활문화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영남가단의 존재와 활동은 16세기 중반이 중요한 시기이다.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현보의 실천적인 삶과 주변의 승경을 바탕으로 한 풍류와 시가 활동이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 집안과 주변의 가까운 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단이 자손에게 이어지고 다시 시대가 지나면서 후학에게 이어지는 양상은 가단의 활동이 문화공간의 문화창조와 연계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강우지역의 가단 형성의 가능성과 성주, 상주 지역의 가단 활동의 가능성은 이들이 한 곳에 한정하지 않고 지역을 옮기면서 문화전파와 문화교차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으며, 18세기 후반 석문정시가단은 실천적 삶의 모습과 생활문화의 면모를 보이는 점을 평가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분강가단은 사람과 자연과 노래가 하나의 도를 이루도록 하면서 문화조절의 역할까지 이룩했으며, 후손과 후학에게 이어져 풍류가 후대까지 수용될 수 있도록 했다. 영우지역과 강안지역의 가단의 형성 가능성은 구성원, 공간, 시가 활동에서 추가 정보가 필요하지만 지역의 교차를 통한 시가 활동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관심을 가질 수 있고, 18세기 후반 석문정시가단은 실천적 삶을 통한 체험미학의 체득, 생활문화의 모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조 영남시가의 연구』(이동영, 형설출판사, 1984)
「석문정시가단의 성립과 그 의미」(박이정, 『한국시가연구』 17, 2005)
「영남지역 가단의 형성과 전개과정」(권두환, 『국문학연구』 12, 2004)
「단가삼결의 창작맥락과 시적 지향」(권순회, 『한국시가연구』 8, 2000)
「영남가단과 강호가도」(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1984)
「퇴계를 중심으로 한 영남가단」(조윤제, 『논문집』 8, 청구대학교,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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