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가단 ()

고전시가
개념
16세기 중엽 이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시조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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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호남가단은 16세기 중엽 이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시조 동호회이다. 16세기 중반에 호남 지역에서는 송순의 면앙정, 임억령의 식영정, 김성원의 서하당, 양산보의 소쇄원을 중심으로 가단이 형성되었다. 가단에서는 강학공간인 당(堂)과 유식(遊息)공간인 정(亭)이란 문화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집단적인 교유를 하면서 시가 작품을 짓고 이를 향유하였다. 대표적인 가단으로 면앙정가단과 성산가단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면앙정가〉와 〈성산별곡〉이 있다. 이들 가단의 구성원은 개별적인 활동을 하기도 하고, 서로 겹치면서 교류하기도 하였다.

정의
16세기 중엽 이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시조동호회.
개설

가단은 특정한 시기에 우리말 노래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활동을 전개한 집단이다. 호남가단은 16세기 중엽 이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동일한 신분의 일정한 구성원이 일정한 공간을 바탕으로 시가 활동을 한 집단을 가리킨다.

호남 지역은 백제 시대의 〈정읍사〉를 비롯하여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1401∼1481), 〈금성별곡〉을 지은 박성건 등이 널리 알려져 있고, 16세기 중반에는 송흠(1459∼1547)이 영광으로 귀향하여 관수정(觀水亭)을 짓고 당시 관찰사이던 송인수가 기영정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그 반향이 지역의 사림에게 크게 미쳤다.

이러한 가운데 16세기 중반에 송순면앙정, 임억령식영정, 김성원의 서하당, 양산보의 소쇄원을 중심으로 가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가단으로 면앙정가단과 성산가단이 있고, 〈면앙정가〉〈성산별곡〉이 대표적인 시가 작품이다.

연원 및 변천

호남가단은 16세기 중반 송순의 면앙정가단에서 시작하여 임억령의 식영정, 김성원의 서하당, 양산보의 소쇄원 등을 포함하는 성산가단으로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 가단의 구성원이 개별적인 활동을 하기도 하고 서로 겹치면서 교류하고 있었던 양상을 볼 수 있어서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호남가단이라는 개념과 함께 개별 지역에서의 교유 활동이 상호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내용

호남가단에서 중요한 점은 이들이 강학공간인 당(堂)과 유식(遊息)공간인 정(亭)의 문화공간을 마련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집단적인 교유를 하면서 시가 작품을 짓고 이를 향유하였다는 것이다.

호남가단을 대표하는 면앙정가단은 송순(宋純, 1493∼1582)이 41세 때인 1533년에 면앙정(俛仰亭)을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 송흠의 훈도를 받은 송순은 담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던 남평박순, 성산의 임억령, 장성의 김인후기대승, 나주의 임제, 창평의 정철 등과 교유하면서 〈면앙정가(俛仰亭歌)〉 등을 짓고 집단적으로 시가를 향유하였다.

송순의 인간적인 면모와 지연과 인맥, 면앙정과 그 주변의 승경 , 구성원들의 풍류적 기질 등이 가단을 형성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이곳에서 지어진 작품은 〈면앙정〉이라는 시제의 한시를 비롯하여 그 차운시, 그리고 〈면앙정삼십영〉 등이 있고, 우리말로 된 노래는 송순의 〈면앙정가(가사)〉, 〈면앙정단가(7수)〉, 〈면앙정잡가(2수)〉 등을 대표로 들 수 있다. 특히 송순의 〈면앙정삼언가〉는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면서 그 사이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밝히고 있어서 면앙정가단의 핵심을 요약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여러 사람의 각각 다른 문화공간을 바탕으로 구성된 성산가단은 임억령의 식영정, 김성원의 서하당, 김윤제의 환벽당, 양산보의 소쇄원 등을 문화공간으로 삼고 이곳을 수시로 출입하면서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의 작품을 남긴 정철(鄭澈, 1536∼1593)이 매우 중요한 구성원으로 부각된다. 면앙정가단과 마찬가지로 성산 주변의 소쇄원, 환벽당, 서하당, 식영정 등의 승경과 구성원의 인맥 등이 성산가단을 형성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성산가단에서 이루어진 작품은 〈소쇄원사십팔영〉 〈식영정이십영〉 등의 한시와 가사 〈성산별곡〉을 대표로 내세울 수 있다. 그리고 정철의 가사 〈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도 창평에 물러나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보면 정철 가사의 대표작이 성산가단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호남가단의 특성을 드러내는 일화로, 송순이 87세이던 1579년에 면앙정에서 회방연을 열었을 때, 정철, 고경명, 기대승, 임제와 관찰사인 송인수 등이 참여하였으며 정철의 주장으로 술이 오른 송순을 가마에 모시고 온실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에서 이들 구성원들의 밀접한 교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면앙정가단과 성산가단의 활동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이다. 김인후는 송순의 문하이면서 정철의 스승으로 호남 지역의 도학을 열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면앙정가단과 성산가단을 드나들면서 시가 활동을 하였고, 이곳에서 임억령, 양산보, 임형수, 백광홍, 기대승, 고경명 등과 교유하였다. 면앙정가단과 관련하여 〈면앙정삼십영〉을 지었고, 성산가단의 소쇄원과 관련하여 〈소쇄원사십팔영〉을 지었다.

의의와 평가

호남가단의 시가활동과 그 성과는 시가 작품 중에서 명편을 산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이유나 도리를 따지는 일보다 풍류를 자랑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가단을 형성하는 배경으로 주변의 승경과 승경을 바탕으로 마련한 당과 정의 문화공간,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구성원 사이의 밀접한 인맥이 이들 가단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호남시단의 연구』(박준규, 전남대학교출판부, 1998)
『호남가단연구』(정익섭, 진명문화사, 1975)
「송흠 귀향의 반향과 송순 문학의 기반」(최재남, 『한국문학논총』 43, 2006)
「호남가단의 시가문학」(전일환, 『고시가연구』, 1998)
「16세기의 호남가단 연구」(정익섭, 『시조학논총』 3·4, 1987·1988)
「호남가단과 풍류정신」(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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