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수로 이루어진 연시조인데 개별 단위의 작품에서는 3행(한역의 5·6구)에 화자의 선언적 태도가 드러나고 있으며, 전체 작품은 개별 작품이 일관된 태도를 표명하면서 단위로서의 서정을 드러내는 연시조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특성을 보여 준다.
여말의 대학자 이제현의 후손이며 사육신 박팽년의 외손인 이별(1475?∼?)이 지은 6수로 된 연시조이다.
이별은 박팽년의 외손이었던 까닭에 벼슬길이 막혀 있었다. 성종 대에 금고가 풀리는 듯했으나 삼형 이원이 김종직의 문하로 무오사화에 연루되면서 다시 벼슬길이 막히자 황해도 평산에 숨어 지내면서 세상을 향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육가(六歌)의 전통을 이어받아 6수의 연시조를 지었다.
그의 시조는 당시 세상에 널리 전승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원래의 노래는 전하지 않고 종손(從孫)인 이광윤이 한역한 작품이 4수 전하고 있다.
4수를 시조 형식에 맞게 복원하면 “내 이미 백구 잊고 백구도 나를 잊네. 둘이 서로 잊었으니 누군지 모리리라. 언제나 해옹을 만나 이 둘을 가려낼꼬.(我已忘白鷗 白鷗亦忘我 二者皆相忘 不知誰某也 何時遇海翁 分辨斯二者)”,
“붉은 잎 산에 가득 빈 강에 쓸쓸할 때, 가랑비 낚시터에 낚싯대 제 맛이라. 세상에 득 찾는 무리 어찌 알기 바라리.(赤葉滿山椒 空江零落時 細雨漁磯邊 一竿眞味滋 世間求利輩 何必要相知)”,
“내 귀가 시끄러움 네 바가지 버리려믄, 네 귀를 씻은 샘에 내 소는 못 먹이리. 공명은 해진 신이니 벗어나서 즐겨보세.(吾耳若喧亂 爾瓢當棄擲 爾耳所洗泉 不宜飮吾犢 功名作弊屨 脫出遊自適)”,
“옥계산 흐르는 물 못 이뤄 달 가두고, 맑으면 갓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네. 어떠한 세상 사람도 청탁을 모르래라.(玉溪山下水 成潭是貯月 淸斯濯我纓 濁斯濁我足 如何世上子 不知有淸濁)”와 같다.
이에 대해 이황은 「도산십이곡발」에서 “세상을 희롱하는 공순하지 못한 뜻”이 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고, 허목은 세상에서 버려진 입장에서 “그 말이 그럴 수 있다.”고 긍정하기도 하였다.
「이별 육가」는 세상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풍자적인 화자의 태도를 드러낸 6수의 연시조이다. 이 육가는 이후 이황의 「도산십이곡」을 비롯한 육가 계열의 연시조 창작과 전승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