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산과 서봉산에 이르는 산줄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말단부에 있다. 절단한 성벽 내부에서 3~4세기의 백제 한성기 토기편이 다수 발견되고 인접한 곳에 4세기대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축성 시점은 백제 한성기의 비교적 늦은 단계로 보인다.
포곡식에 가까운 평산성(平山城)으로 남북 약 550m, 동서 약 475m의 크기이며, 면적은 약 261,250㎡(약 79,000평)에 달한다. 성벽의 둘레는 2,311m이다. 토성의 평면 형태는 부정연한 방형을 띠고 있으나 사용 면적만을 볼 때에는 반달모양에 가깝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성벽의 축성 방법은 삭토법과 성토법을 사용하였다. 동벽은 삭토법으로 구축되었는데 성벽 안팎의 생토면을 절토하여 경사면을 조성하고 윗부분에 절토된 흙으로 다져서 토루를 조성하였다. 남아 있는 동벽의 최대 높이는 약 10m, 북벽은 3~4m, 서벽과 남벽은 3m 내외이다. 북벽이나 서벽은 협축의 방식으로 성벽을 구축하였다. 쌓는 방식은 먼저 하단을 평탄화한 다음 점성이 다른 흙을 교대로 쌓은 성토방식을 이용하였다.
성 안에서 확인된 시설로는 문지 8개소와 옹성시설을 비롯하여 발굴 조사시 확인된 수혈주거지 등이 있다. 문지는 동벽에 3개, 북벽에 3개, 동·서벽에 각각 1개소가 있다. 동문지는 지형상 여건을 고려하여 어긋문을 설치하였고 나머지 문지는 모두 개거식(開据式)으로 축조하였다. 대체적으로 경사면이 꺽이거나 그 중턱과 같이 적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방어의 취약함이 노출되는 구간에는 옹성이나 방어시설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수혈주거지는 네 개의 기둥을 기초로 조성한 것으로 이는 성내 다수의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 외 성곽 인근으로 백제고분군으로 추정되는 토기산포지도 확인된다.
내부의 출토유물은 원삼국시대 중도식 경질무문토기를 비롯하여 백제토기로 볼 수 있는 다량의 평저토기, 항아리, 옹류와 같은 생활토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유물들도 성 안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자료로 볼 때 화성길성리토성은 3~4세기 백제에 의해 처음으로 축조되었고, 늦게는 조선시대까지 폭넓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