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한족대표단 ()

근대사
단체
1945년 4월 25일 개최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대비하고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한 외교 대표단.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45년 4월 25일 개최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대비하고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한 외교 대표단.
설립목적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한국 독립문제를 선전하고 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연원 및 변천

얄타회의가 진행 중인 1945년 2월 11일 미국과 영국 정부는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기구 창설문제를 협의하겠다고 공식 발표를 하였다. 얄타회의에서 영·미 양국은 덤바톤 옥스회의(Dumbarton Oks Conference: 1944.8.21∼10.7)에서 제안된 국제연합 창설에 필요한 기본 헌장을 샌프란시스코회의(일명 ‘상항회의’)를 통해 확정지으려 했다. 샌프란시스코회의 참가국 자격은 1945년 2월 8일 현재 연합국인 나라와 동년 3월 1일까지 연합국 공동의 적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국가로 한정했다. 이에 따라 미국·영국·소련·중국·프랑스 등 50개국이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가하였다.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듣고 1945년 2월 28일자로 대독선전포고를 공포하였으나 임정의 불승인과 연합국의 비회원인 까닭에 국제회의 초청 대상이 되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회의 개최 소식을 들은 미주한인들은 한인 대표가 방청인 자격으로라도 참가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갖고 대응했다. 먼저 1945년 2월 중순 한길수가 미국 정부에 한인 대표의 방청문제를 제기했는데 한인 단체들이 단합해 연명으로 청원할 경우 가능하다는 회신을 받았다. 이런 회신을 받고 2월 22일부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워싱턴DC와 그 인근 소재 5개 단체 대표들과 공식 회동을 갖고 통일된 행동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주미외교위원부의 불참으로 무산되었다.

방청인 참가 시도를 전개할 무렵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2월 25일자 전보로 주미외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에 샌프란시스코회의 대비를 지시하였다. 이승만은 임정의 공식 훈령에 따라 자신을 단장으로 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각계 주요 인사 9명으로 한 임정대표단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지명한 인사들 중에는 그동안 이승만의 외교활동에 반대해 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인사들(한시대·전경무·김호)도 있었다. 이들이 끝내 불참함으로써 중경 임정대표단은 이승만 지지인물들과 중립측 인물들로만 한정해야 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임정의 훈령에 따라 임정대표단이 결성되기 전인 1945년 2월 18일 집행부 특별회의를 개최하고 샌프란시스코회의를 대비하기 위한 독자활동의 일환으로 한인 전체 대표자 대회를 계획했다. 이에 따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의사부는 3월 25일 ‘민중대회’ 란 이름으로, 집행부는 4월 1일 ‘해외한족대회’란 이름으로 각각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의사부는 유진석을 하와이 대표로 선정하였고 집행부는 한시대·김호·전경무·한길수·김용성·김병연·박상엽을 대표자로 선정했다. 대표단의 인적 구성은 대한인국민회, 민족혁명당북미총지부, 중한민중동맹단 출신으로 하여 이승만 지지세력을 제외한 주요 단체 대표가 망라되었다. 대표단의 이름은 해외한족대표단으로 정하였고 조직은 단장 한시대, 재무 유진석, 단원 김호·한길수·김용성·김병연·박상엽으로 정했다. 이후 임정대표단과 합동 사무를 추진할 때는 단장 한시대, 합동교섭 김호·김용성, 대외교섭 전경무, 대외선전 한길수, 재무, 유진석, 기록 이정근으로 재구성하였다.

기능과 역할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기존의 임정대표단과 별도로 해외한족대표단을 결성한 것은 임정과 이승만에 대한 강한 불신과 외교활동을 미주한인의 독자적인 힘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회의가 개최될 때 어느 대표단도 참가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똑 같은 한국의 독립문제를 갖고 두 대표단이 각각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국제무대에서 수치스런 일이었다. 이것은 미주한인사회의 여론에서도 계속 지적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회의가 개회되는 4월 25일 이승만이 이번 국제회의 기간동안만이라도 선전외교활동을 공동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여기에 적극 호응한 해외한족대표단은 이후 임정대표단과 합동운동을 전개하고 5월 1일 공동실행위원회까지 조직하는데 성공하였다. 공동실행위원회는 회장 이승만과 부회장 한시대를 비롯해 교섭부와 선전부로 구성하였고 합동한 단체 이름을 ‘한인대표단(Korean Delegation)’으로 정했다. 그리하여 5월 9일 한인대표단의 이름으로 마침내 공동 「성명서」를 대외에 발표하였다. 이승만과 한시대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서」에는 샌프란시스코회의가 침략을 당한 식민지 민족에게 자유와 국권 평등을 실현하는 국제조직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이를 위해 한국 민족은 이번 회의를 적극 지지한다고 하였다.

공동실행위원회 구성과 공동 「성명서」 발표가 순조롭게 진행될 때 5월 10일 이승만이 공공실행위원회 위원장직에서 사면하였다. 사면 이유는 임시정부를 대표한 임정대표단이 더 이상 민간 대표인 해외한족대표단과 공동 활동을 전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표면적인 사유 외 이승만이 추진한 얄타밀약설에 대한 선전 계획을 해외한족대표단이 만류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독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이승만이 미국 언론을 상대로 단독으로 얄타밀약설을 폭로하며 단독 활동을 전개하자 두 대표단 간의 합작 노력은 무산되었다.

이에 따라 해외한족대표단도 독자적인 선전외교활동에 나섰다. 먼저 미국 언론을 통해 이승만의 얄타밀약설과 그의 반소운동이 미주한인들의 민의가 아님을 해명하였고 「비망록」을 작성해 6월 2일자로 연합국의 주요 외교대표들과 언론에 배포하였다. 샌프란시스코회의를 위해 온 각국의 언론 기자들을 초빙해 한국독립을 위한 동정과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한국지도를 만들어 각 언론사에 배포하고 한국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촉구하였다.

의의와 평가

해외한족대표단은 국제대회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별도로 미주한인이 단독으로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던 그동안의 미주한인들의 특성으로 볼 때 이같은 독자 외교활동의 추진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미주지역 한인 단체의 세력이 점차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것은 임정에 대한 맹목적인 지원이나 복종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비판과 대안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한국 독립이라는 민족 문제를 임정 중심의 틀에서 벗어남으로써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성격 변화를 잘 보여 주었다.

참고문헌

『신한민보』
『국민보』
『태평양주보』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리들리, 1958)
『재미한인의 꿈과 도전』(홍선표, 연세대학교 출판부, 201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