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은 인(因) 즉, 원인과 이유에 대한 학문이란 뜻으로 불교의 논리학을 가리킨다. 인명은 불교의 학문 체계인 5명의 한 분야이다. 5명은 내명(內明), 성명(聲明), 의방명(醫方明), 공교명(工巧明), 인명 (因明)이다. 논증의 전개상 원인을 규명하는 인명은 불교 논리학을 대표하는 말로 쓰였다. 인명의 학문은 타 학파를 비판하고 자기 학파의 교학 체계를 드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인명에 대한 관심이 높았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인명이란 범어 hetu-vidya의 역어로 불교논리학을 지칭한다. 인 즉 원인이란 불교논리학상 간접추리인 논증에 있어 이유에 해당하는 것으로, 논증의 전개상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는 까닭에 이 원인을 규명하는 인명이 불교논리학을 대표하는 말로 쓰인 것이다.
인명은 전통적으로 불교 내부에서 학문 체계를 말하는 5명(明) 즉 내명(內明: 불교의 일반 교학), 성명(聲明: 문법 음운에 관한 학문), 의방명(醫方明: 의술에 관한 학문), 공교명(工巧明: 공업 공예에 대한 학문), 인명의 다섯 분야 중의 한 부분이다. 이 인명의 학문은 다양한 종교 철학이 상호 경쟁하는 가운데 타 학파를 비판하고 자기 학파의 교학 체계를 드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기불교 이래 불교의 교학 체계는 인도의 정통 철학과 끊임없는 논쟁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당연히 대승불교의 철학 체계로 이어져 독자적인 불교논리학의 성립에 이르게 된다. 디그나가〔Dignāga, 진나(陳那): 480~540년〕를 필두로 성립되는 불교논리학 즉 인명학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는 정통 인도철학의 니야야학파와 불교가 오랜 기간 논쟁 대립을 거듭하였다. 그러한 역사적 경과 속에 불교논리학에서는 니야야학파로 대표되는 인도논리학을 고인명(古因明)이라 부르고, 진나가 세운 새로운 불교논리학을 신인명(新因明)이라 불렀다.
고인명과 신인명의 대표적인 차이점은 논증을 위한 논리식 설정의 차이를 들 수 있는데, 니야야학파는 다섯 개 논리식 즉 5지작법(支作法)을, 불교에서는 세 가지 논리식 즉 3지작법을 내세운다. 3지작법이란 5지작법의 논리식인 종(宗;주장) · 인(因:이유) · 유(喩:유례) · 합(合:결합) · 결(結:결론)의 형태에서 마지막의 두 가지 즉 합과 결을 앞의 논리식의 반복이라 하여 생략한 것으로, 그 대신 인의 개념을 상세하게 논하여 세 가지의 성격으로 정의한 것이다.
이것이 진나가 밝히고 있는 인의 3상(相)으로, 인 즉 이유는 반드시 세 가지 성격을 갖는다고 한다. 첫째로 이유는 주장에 속한다고 하는 점〔변시종법성(遍是宗法性)〕이며, 둘째로 이유는 반드시 긍적적인 유례에 속해야하는 점〔동품정유성(同品定有性)〕, 셋째로 이유는 부정적인 유례에 절대 속해서는 안된다는 점〔이품변무성(異品遍無性)〕이다.
진나에 의해 새롭게 전개된 불교논리학은 진나 이후 다르마키르티〔Dharmakīrti, 법칭(法稱): 600660경〕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인도에서는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지지만, 이 법칭과 그 이후의 논리학적 경과는 중국에 전해지지 않는다. 중국에 불교논리학이 본격 전해지는 것은 인도에 구법 유학한 현장(玄奘: 602664)에 의해 인명에 관한 책이 번역된 것에 연유한다.
현장은 인도에서 귀국한 후 진나의 책으로 『인명정리문론(因明正理門論)』과 진나의 제자로 추정되는 상갈라주(商羯羅主)의 『인명입정리론(因明入正理論)』을 번역하였다. 일반적으로 진나의 주저서로 간주되는 『집양론(集量論, Pramāṇasamuccaya)』은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지만, 인도에서는 이 『집양론』에 대한 법칭의 주석서 『양평석(量評釋, Pramāṇavārttika)』과 함께 불교논리학의 대표적 저술로 간주되어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는 특히 현장이 『인명입정리론』(647년 번역)을 번역한 이후 상당수의 제자들이 이 책을 연구하여 주석서를 지었다. 이 주석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현장의 직제자인 규기(窺基: 632~682)의 『인명입정리론소』이며, 또 주석서를 지은 사람 가운데 신라의 유학승으로 추정되는 문궤(文軌)의 『인명입정리론소』도 ‘장엄소(莊嚴疏)’라고 불려 당시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현장의 번역은 당시 신라에도 영향을 끼쳐 원효(元曉, 617~686) 또한 『인명입정리론기』, 『판비량론』 등을 짓는 계기가 되었다. 현장의 제자인 규기의 『인명입정리론소』에서는 현장이 인도에서 만든 유식비량(唯識比量)의 논리식과 관련해 당시 신라의 인명학에 대한 언급이 있어 주목할 만하다. 즉 현장은 인도에서 소위 만법유식(萬法唯識)을 논증하는 유식비량이라 불리는 논리식을 만들어 사람들 앞에 제시하였는데 그것에 대해 인도에서는 물론 중국에서도 아무도 의문을 제시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신라에서 순경법사(順憬法師)가 이 유식비량의 문제를 지적하는 내용의 글을 중국에 보냈다고 규기는 기록하고 있다.
곧 신라의 순경법사는 현장이 유식비량의 논증식으로 만법유식을 논증한 것이지만, 그와 동일한 논증식이 유식이 아니라 외계를 인정하는 논증식으로도 사용될 수 있는 논증식을 규기 앞으로 보냈던 것이다. 이렇게 동일한 논증식이 유식사상이나 외계실재론 양측에 동일하게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인명학에서 상위결정(相違決定)의 모순에 해당하는 것으로, 현장의 유식비량의 모순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순경법사의 지적에 대해 오랫동안 그 상위결정의 논리식을 만든 사람이 순경법사인지 원효인지를 두고 학계에서는 중요한 논의가 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 전하는 선주(善珠, 723~797)의 『인명론소명등초(因明論疏明燈抄)』에서는 “이 (유식비량의 문제를 지적한) 결정상위는 원래 신라의 원효대덕이 지은 것인데 후에 순경법사가 이 비량을 얻었지만 해석할 수가 없어 건봉년(乾封年) 중에 당나라에 보내 그 의문을 해결했다”라고 말해 원효가 지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신라시대에도 인명학에 대한 많은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는 현장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인명에 대한 관심이 높았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이후 실제 동아시아 한역 불교권에서는 인명학에 대한 연구 전통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불교논리학이 살아있는 승원의 교육으로 전해지는 곳은 티베트로서, 티베트 불교에서는 인명학이 승려 교육의 기본 학문으로 간주되고 있다. 곧 승려로서 배워야할 첫 번째의 학문이 인명학으로, 불교의 교의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논리학에 의거해 철저하게 다지고 있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