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초(張基礎)는 1893년 5월 13일 평안북도 강계 출생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은 김유하(金筱廈)이다.
1919년 3 · 1운동 직후 고향인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문옥면(文玉面) 문악동(文岳洞)을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0년 음력 4월경 문옥면에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청년단(靑年團)을 조직하여 독립 자금을 모집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 지린성〔吉林省〕 통화현(通化縣)에서 무장 독립운동 단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이재위원(理財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지단장(支團長)으로 활동하던 4월 차천리(車千里)와 함께 부하들을 이끌고 일제의 지방 통치 기구인 통화현 칠도구(七道溝)의 보민회사무소(保民會事務所)를 습격하고 국내 잠입을 엿보았으며, 5월에 부하 6명과 함께 지린성 집안현(輯安縣) 쌍분하(雙分河) 도무구(道無溝)에서 친일 단체인 조선민단(朝鮮民團)의 한응보(韓應甫)와 동(同) 구장(區長) 최원탁(崔元卓)을 밀정(密偵) 역할을 했다는 죄목으로 처단하였다.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진(高山鎭) 순사주재소와 위원군(渭原郡) 구읍(舊邑)의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경찰을 사살하였다. 1922년에 김승학(金承學) · 백광운(白狂雲) 등과 함께 중문판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행하였다.
1924년 동지 백광운(白狂雲) · 최지풍(崔志豊) 등과 함께 참의부(參議府) 결성 과정에 참여하였다. 참의부 조직 후 처음에는 제1중대에 속해 있다가 경리부(經理部) · 선전부 · 군사부 · 행정부 위원 등을 지냈다. 이어 민사부위원장(民事部委員長)을 맡아 집안현, 환인현(桓仁縣), 임강현(臨江縣), 통화현 일대에 거주하는 한인 4천여 호를 통할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이 지역 한인들을 군민자치(軍民自治)에 종사하도록 노력하였고, 한인들로부터 대양(大洋) 3만여 원의 의무금(義務金)을 걷어 통의부 운영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1924년 5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압록강 국경을 순시하기 위해 비행선 웅비호(雄飛號)를 타고 압록강으로 향하였을 때 위원군(渭原郡)의 강 맞은편에서 사이토를 습격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1929년 국민부(國民府) 민사부위원장으로 집안현, 환인현, 임강현, 통화현 등지의 한인들을 담당하며, 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11월 국민부원 3인과 함께 통화현 나권주(羅圈溝) 지역에 들어왔다가 봉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1929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제령(制令) 제7호 및 치안유지법, 살인 · 강도 등의 죄목으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경성형무소에서 11년 4개월을 복역한 후 1941년 3월에 출옥하였다.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