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숙(申貞淑)은 1910년 5월 12일 평안북도 의주(義州) 갑부로 독립운동을 하던 신조준(申肇峻)의 딸로 태어났다. 전주 고등과를 졸업하였고, 1928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면 신천리 출신의 장현근(張鉉瑾, 이명 송진표)과 혼인하였다.
신정숙의 남편 장형근은 독립운동을 위해 192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는데, 윤봉길 의거 다음 날인 1932년 4월 30일 일본군에 체포되어 6월 7일 안창호(安昌浩) · 김덕근(金德根) 등과 함께 국내로 호송되었다. 장형근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1932년 7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와 중국으로 건너갔고, 신정숙은 40여 일의 남편 옥바라지를 통해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신정숙은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1941년 3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거행된 한국광복군 징모(徵募) 제3분처 성립식에서 회계조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징모 제3분처 대원은 신정숙과 주임위원 겸 선전조장 김문호(金文鎬), 정보조장 이지일(李志一), 훈련조장 한도명(韓道明) 등 4명이었다.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창설 이전부터 독립군과 국내외 거주 한인, 일본군에 배속된 한인 등을 통해 군대 양성 계획을 세웠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설치 이후 초모 활동에 집중하였다. 초모 활동을 위한 별도의 기구로 5개의 징모 분처를 설치하였는데, 신정숙 등 징모 제3분처 대원들은 1941년 4월 10일 제3전구장관부(戰區長官部部) 소재지인 장시성〔江西省〕 상요(上饒)에 도착하여 왕가원(汪家園)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라는 간판을 내걸고 본국과 일본, 만주(滿洲), 화베이〔華北〕, 상하이, 난징〔南京〕 등지에 연락망을 설치하여 징모와 선전 공작을 진행하였다.
한도명이 병사하였지만, 신정숙 등 3명의 징모 제3분처 대원들은 반 년이 안 되어 23명을 초모하고 안후이성〔安徽省〕 각 처에 통신 거점을 마련하였다. 징모 제3분처는 연산(燕山), 숭안(崇安), 건양(建陽) 등지를 거쳐 푸젠성〔福建省〕 남평(南平)으로 이동하였는데, 남평은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 있는 제2지대 본부와 거리가 멀어 통신 연락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는 등 한국광복군의 조직이 개편되면서 1942년 10월 1일 징모 제3분처는 제2지대 제3구대(區隊) 제3분대(分隊)로 편성되었다.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韓國光復軍九個行動準繩)으로 빼앗아 간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가 요구하자 중국 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을 점검하였는데, 1943년 7월 8일부터 7월 12일까지 제3분대를 조사한 중국 군사위원회는 제3분대의 대원 수를 21명으로 기록하였다. 그들은 신정숙과 김운경(金雲慶) · 왕영일(王英一) · 마춘림(馬春林) · 이지일(李志一) · 김형석(金享石) · 이명식(李明植) · 한덕원(韓德源) · 유명경(柳明慶) · 유상현(劉尙玄) · 이기심(李基深) · 진몽각(陳夢覺) · 증명(曾明) · 조동걸(趙東傑) · 최일영(崔日英) · 김운정(金雲廷) · 사중득(史中得) · 우증영(柳增榮) · 정봉수(鄭逢水) · 김의(金毅) 등이었다. 신정숙 등 제3분대는 1944년부터 푸젠성 건양에 근거지를 두고 항일 선전 및 초모 공작을 전개하였다.
1972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77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1997년에 사망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