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계사 명부전에 봉안된 일괄 존상으로 지장보살과 무독귀왕·도명존자 삼존, 시왕상 10구 및 시왕의 권속인 판관, 사자(使者), 동자, 금강역사 등 총 25구로 구성되어 있다. 명부전은 1870년에 화계사 중창을 주도한 초암(草庵) 선사가 신정왕후(神貞王后, 1809~1890)의 후원을 받아 세운 것인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왕실에서는 이 명부전에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지장보살상을 봉안할 것을 주문했고, 이에 전국에서 물색하여 황해도 배천 예성강 근처의 강서사에서 이 불상들을 모셔와 1877년에 봉안한 것이라 한다. 지장보살의 복장발원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고려말 나옹화상이 제작한 불상이라는 구전도 있었다. 그러나 발원문이 발견되면서 실제 강서사에서 제작된 것은 맞지만, 나옹화상이 아니라 화원(畵員) 영철(靈哲) 등에 의해 인조 27년(1649)에 제작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지장보살의 복장발원문을 통해서 제작배경과 발원자, 제작자 등을 알 수 있는데 명부전 안의 모든 존상이 지장보살상의 양식과 대체로 동일하여 모두 같은 시기에 같은 조각가들에 의해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본존 지장보살은 얼굴, 상체, 하체의 비례가 안정감 있고 자세는 당당하며 옷자락의 처리는 깊이가 있으면서도 유려하다. 특히 자유롭게 흘러내리는듯 하면서도 정제된 균제미를 느끼게 하는 옷 주름이 인상적이다. 얼굴은 단호하면서도 자비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며 예불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듯한 눈이 특징적이다. 백호 아래로 미간과 콧등이 직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한번 급격히 꺽이면서 높아지는 것과 귀가 통통하면서 약간 정면을 향해있는 점은 명부전 불상들의 특징이다. 수인은 하품중생인으로 오른손은 어깨높이로 들고 왼손은 왼쪽 옆구리 높이로 들고 있다. 통견의 착의법에 내의는 좌우대칭으로 접혀있다. 무독귀왕상은 화려한 통천관을 착용하고, 두 손으로 공손히 옥새함을 받든 모습이다. 함을 나란히 받든 두 손 아래로 소매를 따라 긴 소맷자락이 굵고 정연하게 흘러내리고 있어, 긴장감과 운동감을 부여해 준다. 석장을 든 도명존자의 얼굴은 지장보살과 닮았다. 다만 지장보살처럼 뚫어지게 바라보는 인상이라기보다는 조금 부드러운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지장보살이 부처의 가사를 입은 반면, 도명존자는 승려의 가사를 입었는데, 녹색의 가사에 붉은색 대의를 입었고, 대의를 묶는 매듭과 금색의 고리가 표현되어 있다. 시왕은 모두 의자에 앉은 모습이며 전반적인 모습은 무독귀왕과 유사하다. 정면을 보거나 장부를 기록하거나 또는 수염을 쓰다듬는 등 다양한 변화를 주어 시왕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화려한 옷을 입고 옷자락을 휘날리는 금강역사와 시왕의 사이사이에 서 있는 판관, 시자, 동자도 명부전에서의 위계는 낮지만, 주요 권속과 동일한 수준의 뛰어난 기량으로 조각되어 있다. 동자상이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는 결실된 상태이다.
화계사 명부전의 일괄 존상과 같이 지장보살상부터 동자상에 이르기까지 조각가의 뛰어난 기량이 모든 작품에 반영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더욱이 이 작품들은 발원문을 통해서 조성연대와 조각가, 원래 봉안했던 사찰까지를 알 수 있는데, 조선 후기 불교 조각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