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판서의 생일잔치 날 한 점술가가 방문하여 가문에 재해가 닥쳐올 거라는 점괘를 내놓는다. 액풀이로 서자인 길동을 처치하라고 이르자 홍 판서는 이에 넘어가 길동에게 부모의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한 후 집에서 떠나길 명한다. 길동은 이것이 홍 판서의 아내 초란의 흉계임을 알게 되고 친어머니에게 이별을 고하고 집을 떠난다.
길동은 백성을 괴롭히는 고을 사또 엄가진에게 매를 맞고 세상을 뜬 아버지 때문에 양반이 미워 도둑질을 하게 된 어린 차돌바위를 만나게 된다. 둘은 엄가진에게 고문당하고 있는 곱단이의 아버지를 구하고, 검술을 배우기 위해 백운도사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차돌바위는 백운도사가 허드렛일만 시키자 참지 못하고 산을 내려가고 길동은 오랜 수련 끝에 무술을 깨우치고 칼을 하사받는다.
백운도사는 길동에게 단발령에 덥석부리라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이르고 길동은 혼자서 검술 공부를 하고 있던 차돌바위를 만나 함께 곱단이를 만나러 간다. 길동과 차돌바위는 활빈당인 덥석부리와 함께 탐관오리들을 응징하기 시작한다. 이에 병조판서 최골훈은 홍길동의 아버지 홍 판서와 생모를 인질로 가두고 홍길동은 부모를 구하기 위해 최골훈과 결투를 벌인다. 결국 홍길동은 최골훈을 처치하고 활빈당은 대승리를 거둔다.
감독 신동헌은 1966년에 세기상사의 제안으로 동생 신동우가 소년조선일보에 연재하던 「풍운아 홍길동」을 기반으로 제작에 착수하였다. 1967년 1월 21일 세기극장과 대한극장에서 개봉하였는데 당시 서울 개봉관에서만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흥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남동 세기상사의 촬영소 지하에서 30여 명의 스태프들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된 「홍길동」(1967)은 미군들이 쓰다 남은 정찰용 필름의 젤라틴을 양잿물에 벗겨서 사용하였고, 셀룰로이드 전용 물감이 없어서 포스터물감을 이용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신동헌은 이 영화가 성공한 이후 제작사와의 갈등으로 영화사를 옮겨 영화의 후속편 격인 「호피와 차돌바위」를 제작하여 1967년 8월 개봉하였다. 「홍길동」의 필름은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일본에서 수집하여 공개하였다. 그래서인지 남아 있는 필름에는 당시 일본 수입사와 일본인 성우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흥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이후 상업 애니메이션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또한 이 영화는 신동헌을 비롯한 정욱, 넬슨 신, 김대중 등 다양한 애니메이터들의 터전이 되어, 향후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기반이 된 인력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첫 번째 시도라는 사실, 예산과 기술상의 한계를 감안하고 본다면, 이 영화는 장면의 연출과 편집, 컷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또한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편입되기 이전이라서인지, 작품의 소재에서 표현방식에 이르기까지 매우 한국적이다. 신동헌은 제작 당시 한국적인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조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