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태조 1) 10월 25일에 태조는 관리 임명 법식인 고신식(告身式)을 고쳐 4품 이상의 경우 왕명에 따라 서경을 통하지 않고 곧장 임명장이 발급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4품 이상의 고신을 관교(官敎)라고 한다. 여기서 4품은 자급[資級: 관원에게 내리는 신분적 품계, 혹은 관계(官階)라고도 부른다]을 기준으로 하며 이때 만들어진 임명제도로서의 관교는 갑오개혁 전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의 관교는 고려의 임명제도와 비교하였을 때 왕의 임명권 신장을 보여 주는 문서제도이다.
1392년 7월 17일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3개월 후인 10월 25일에 고려의 유제에 따라 유지하였던 관리 임명제도를 개정하였다. 『태조실록』에는 “고신식을 바꾸었다. 1품에서 4품까지는 왕지(王旨)를 내리고 관교(官敎)라고 하며, 5품에서 9품까지는 문하부에서 왕명을 받들어 첩을 주며 교첩(敎牒)이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생겨난 문서가 관교이다. 곧 4품 이상의 관원을 국왕이 직접 임명하는 양식인 왕지로 임명한 문서이다. 이것은 4품 이상의 고신에 대해서 사헌부와 문하부 낭사의 서경을 면제하고 곧장 왕명에 따라 임명장을 발급하도록 한 조치이다. 이러한 조치는 관리 임명에 대한 신료들의 집단적인 보증인 서경을 대폭 축소한 것으로, 왕의 인사권 강화를 반영하는 조처였다. 이러한 제도 개정은 당상관 인사를 왕이 장악한 것과 함께 인사권이 왕에게 집중되도록 한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서인 관교는 서두에 기록되는 ‘왕지’가 1435년(세종 7) 9월 3일 이후 ‘교지(敎旨)’로 바뀌어 갑오개혁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실록에는 관교보다는 직첩(職牒, 職帖), 교지 등의 용어로 기재되어 있다.
관교의 문서 형식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어 있다. 문서의 형식은 서두에 ‘교지’라고 제시하고 본문에 임명 사실을 “모위모계모직자(某爲某階某職者)”와 같이 기록한 후 발급 일자와 어보(御寶)인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었다. 4품 이상 고신의 발급 관사는 문관의 경우 이조, 무관의 경우 병조였지만 서식상에는 발급처가 나타나지 않아 왕의 직접 임명 문서임을 보여 준다. 4품 이상 고신의 임명 대상자는 14품의 문‧무관, 추증(追贈) 대상자, 증시(贈諡)자, 문‧무관 4품 이상의 처, 19품의 내명부, 왕실‧종친과 그 처 및 부마, 4품 이상의 왜인(倭人)과 야인(野人), 노인직(老人職)에 임명되는 자였다. 이들의 임명 시에는 시호 서경을 제외하고는 대간(臺諫)의 서경을 거치지 않았으며, 임명의 내용은 산관(散官)과 직사(職事)를 함께 내리는 경우, 산관을 내리는 경우, 직사를 내리는 경우로 나누어 작성되었다.
1392년에 왕명으로 규정된 관교는, 고려 말 임명 문서가 왕지(5품 이상)와 교첩(6품 이하)이었다는 견해를 수용한다면 품계가 4품으로 축소되기는 하였으나 대신 고려시대의 전품(全品) 서경과 달리 서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왕의 임명권 신장을 반영한 문서가 된다. 그리고 고려 말 임명 문서가 사첩(謝牒)이었다는 견해를 수용한다면 조선시대 관교는 왕의 직접적인 임명 권한을 4품 이상의 관원으로 확대하여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려 말의 임명 문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실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단언하기 어렵지만, 관교는 전품 관원의 임명에 대해 서경을 했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서경이 없는 국왕 직권의 임명 문서라는 점에서 조선 국왕의 임명 권한 신장을 보여 주는 문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