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본은 조선시대에 중앙과 지방의 아문이 직계할 때 사용한 문서 형식 가운데 가장 높은 위상의 문서이다.
조선시대에 국왕에게 담당 업무를 직접 아뢰는 행정 절차를 직계라 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용문자식(用文字式)에 따르면, 장관이 종2품 이상인 아문과 승정원, 장례원, 사간원, 종부시는 직계할 수 있는 직계 아문이었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제장(諸將)도 직계할 수 있었다. 직계 아문이 담당 업무를 직계할 때 사용하던 대표적인 문서가 계본이다.
또한 용문자식에서는 “큰 일[대사(大事)]은 계본(啓本), 작은 일[소사(小事)]은 계목(啓目)”이라 하여 문서에 담는 사안에 따라 계본과 계목의 기능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1455년(세조 1) 계목의 형식을 개정하여 관인을 찍게 하는 등 문서 형식상의 신뢰성을 구비하면서 조세나 형정 등 중요한 일에도 계목을 사용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한편 조선 전기 실록에 등재된 계본의 작성기관은 대부분 관찰사 등 지방관아이다. 이는 조선 후기 실록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방 관아는 계목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본의 사용 빈도가 높았던 것이고, 상대적으로 간단한 형식의 계목을 사용할 수 있었던 중앙 관아에서는 계본의 사용 빈도가 떨어졌던 것이다. 이에 중앙 관아에서 계본의 사용 범위는 관원의 포폄(褒貶), 사형수 등 주요 범죄의 형률 적용[조율(照律)] 보고, 국가 의례 일정 등 몇몇 고정된 사안에 한정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경국대전』에서 계본의 발급 사유를 큰 일[대사]로 규정한 것은 실제 적용에 있어서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주요한 결정’이라는 의미보다는 예식적으로 주요한 사안이라는 의미가 강하였다.
조선을 제외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신하가 국왕에게 아뢰는 행위를 표현하는 용어는 ‘계(啓)’가 아니었다. 진(秦)의 중국 통일 이후 황제에게 아뢰는 행위를 ‘주(奏)’라 칭하고, 이 글자의 일반인 사용을 금지한 이후 중국에서는 계속 황제 전용 용어로 ‘주’를 사용하였다. 우리나라도 고려시대에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 ‘주’를 사용하였고,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한 이후에는 ‘신(申)’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계’자를 국왕에 한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실록에 의하면 그 시기는 1433년(세종 15)이다. 이전까지 질서 없이 사용하던 ‘신’자 대신 ‘계’자를 사용하도록 통제한 것이다.
계본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지만, 원 간섭기 이후 국왕에게 업무를 보고하는 문서에 사용하던 용어는 여러 차례 변동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하여,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1433년 이후로 계본이 중앙과 지방의 아문이 직계할 때 사용하던 문서를 지칭하고, 본문 내에 사용하는 문구가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계본은 조선시대 관료 조직에서 국왕이 차지하는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설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문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