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홍제동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금동불상과 건물터 관련 생활유적.
이칭
이칭
홍제동 구석기·청동기시대 유물산포지, 홍제동 청동기시대 유적, 홍제동 고려시대 분묘유적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금동불상과 건물터 관련 생활유적.
개설

강릉홍제동유적은 강릉 남대천 변의 북쪽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한다. 그동안 지표조사에서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편과 석기 1점이 채집되고 고려시대의 토기편도 채집되어 청동기시대 유적과 고려시대 무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2004년 강릉과학산업단지 지원도로(2호) 개설공사로 인해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가 재실시되어 구석기시대 긁개와 청동기시대 무문토기편이 추가로 수습되어 2006년 예맥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조사하였다. 그 결과, 구석기시대 뗀석기 · 신석기시대 어망추와 미완성 석부 등이 조사되었으나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또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과 건물지, 대한민국 시기의 민가건물지가 확인되었다. 2007년 예맥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에 의해 통일신라~조선시대의 절터(일명 홍제동사지)로 확인되었다.

내용

강릉홍제동유적은 북단부와 중앙의 구릉부, 그리고 남단부로 구분할 수 있다. 시굴조사 결과, 북단부의 건물지(홍제동사지)에서는 기단석열이 조사되고 9세기의 금동불상 1점, 15세기의 분청자편, 18~19세기의 와편 및 자기편이 수습되어 절터로 추정되었다. 가운데의 구릉 유물산포지에서는 구석기시대의 몸돌 · 격지 · 긁개 등 뗀석기 3점이 지표채집되고 일부 고토양층이 확인되었으나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또한 신석기시대의 타제어망추 6점, 미완성석부 1점, 빗살무늬토기편 2점도 수습하였으나 유구는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유물포함층이 삭평된 것 같다.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주거지의 흔적보다는 신석기인이 남대천 변에서 어로 활동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점유하였던 임시 거처(temporary settlement)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남단부에서는 민가터 2기와 뒷간, 축대 및 암거 등이 조사되었다. 이곳에서 20세기의 토기편과 재활용된 조선시대 와편, 그리고 1960~1970년대에 사용된 생활자기가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민가터로 추정된다.

이중 북단부의 건물지는 시굴조사의 범위를 확장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절터로 밝혀졌다. 이곳은 해발 60m 내외의 구릉이 감싼 곡간지역으로 남고북저형이다. 조사된 유구는 금당지 1곳, 승당지 1곳, 집수정 1기, 축대와 담장지 등으로 전체적으로 동북향을 하고 있다.

금당지는 중심축석이 동-서향으로 적어도 2회 이상 중건된 것으로 판단된다. Ⅰ시기 금당지는 남쪽 산록방향으로 초석 1개와 적심 4개가 잔존하여 측면은 1칸으로 판단된다. Ⅱ시기 금당지는 남쪽에 초석 3개가 남아 있고 1개는 적심 일부만 잔존하며, 북쪽은 서쪽 모서리에 1개의 적심만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판단된다.

승당지는 중심축선이 곡간의 방향과 일치하는 남-북향으로 동쪽 승당지보다 서쪽 승당지가 더 잘 남아 있다. 서쪽 승당지는 3회 이상 중창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Ⅰ시기 승당지는 적심 6개만 잔존하고 있어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추정된다. Ⅱ시기 승당지는 초석과 적심이 각각 4개인 것으로 보아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추정된다. Ⅲ시기 승당지는 남쪽 끝에 초석 2개만 잔존한다. 한편 동쪽 승당지는 2개의 적심만 남아있어 그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축대는 금당지와 승당지 전면에 각각 2시기에 걸쳐 조성되었다. 집수정은 수로를 시설하고 동쪽 승당지 서북쪽 끝지점에 방형으로 조성하였다. 담장지는 금당지의 남서쪽 산록부와 경계선에 조성하여 사찰을 감싸고 있다.

유물은 기와류와 도자기류가 주종을 이룬다. 특히 기와류에서 ‘신복(神福)’명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 명문와는 강릉 내곡동 신복사지 · 성내동 강릉읍성지 · 구정리 흑암사지 · 관음리 안국사지 등에서도 수습된 것으로 보아 한 와요지에서 제작되어 여러 소비지로 공급된 것으로 판단된다. 도자기류는 고려청자 · 조선백자 · 분청자 · 도기 · 토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가장 빠른 것이 10세기 전반기의 해무리굽 청자이다.

이러한 발굴결과로 보아 홍제동사지는 통일신라 말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가장 뒤쪽인 남쪽으로 금당을 배치하고 전방 양쪽 측면인 동쪽과 서쪽에 승당을 배치하였으며, 가운데는 마당으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 가람배치를 하였다. 그러나 마당에서 탑지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탑은 조성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강릉홍제동유적은 그동안 청동기시대의 토기편과 석기가 조사되고 위치적으로도 선사인이 거주하기에 매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홍제동 청동기시대 유적’ 또는 ‘홍제동 유적’으로 명명되었으나 시 · 발굴조사 결과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또 고려시대 토기편들도 지표에서 채집되어 고려시대 무덤이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홍제동 고려시대 고분유적’으로 명명되기도 하였으나, 시굴 및 발굴조사 결과 고분유적이 아니라 통일신라 말~조선시대의 절터로 밝혀졌다.

참고문헌

『강릉 홍제동유적: 강릉 과학일반지방산업단지 진입도로부지내 유적 발굴조사보고서』(예맥문화재연구원, 2009)
『강릉과학산업단지 지원도로(2호선) 개설공사구간 실시설계용역 지표조사 보고서』(강릉대학교박물관, 2004)
『문화유적분포지도: 강릉시』(강릉대학교 박물관, 1998)
『영동고속도로(강릉-새말)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강릉대학박물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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