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6일 울진 성류굴을 관람하던 박홍국이 명문을 발견하고 12월 7일 울진군청 심현용에게 성류굴에 대한 조사 협조를 요청하였다. 12월 9일 박홍국과 심현용 및 최민희는 사진촬영과 탁본 등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판독작업을 진행하여 신라시대의 명문임을 파악하게 되어 12월 15일 박홍국은 「매장문화재 발견신고서」를 울진군청에 제출하게 되었다. 12월 16일 심현용과 박홍국은 공동으로 판독문을 작성하여 울진군청을 통해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석각의 명문 첫째 줄은 비교적 또렷한 편이나, 그 밖의 명문들은 석회암 특유의 종유(鐘乳)가 녹아 흘러내리면서 새겨진 글자의 획 일부를 덮기도 하고 또 글자의 박락과 마멸로 인해 판독이 매우 어렵다. 정확한 전문 해석은 어려운 실정이나 시기를 나타내는 ‘癸亥年三月八日’은 명확하며, 그 외 관등명인 ‘大奈麻’, 또 ‘大息食’과 ‘刀人’은 일치를 보고 있다.
이를 참고로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계해년(?) 3월 8일에 △축부지(△丑付智, 또는 壧主 荷智나 窟主 荷智) 대나마(大奈麻)가 … 아는 사람들[知人]고 함께(또는 점복인[姑人]은) 크게 쉬고(놀고) 먹었다. (이곳에) 글자를 새긴 사람[刀人]은 △△이다.”로 해석된다. 특히 명문 후반부 판독의 어려움이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계해년(?) 3월 8일에 신라 왕경의 관리인 대나마(신라 경위 제10위)가 울진 성류굴에 와서 크게 먹고 놀면서 어떤 행위를 하고 글을 남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처음 학계에 보고한 박흥국과 심현용은 그 시기에 대해 “금석문에서 확인되는 신라 제17관등 중 경위 제10등의 관등명인 대나마(大奈麻)가 1988년 국보로 지정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 법흥왕 11)와 동일한 글자로 되어 있고 568년 이후에는 ‘대나말(大奈末)'로 사용되는 점, 문장의 첫머리가 간지(干支)로 시작되는 점, 그리고 부명(部名)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신라 중고기 금석문의 기재방식인 ‘직명(職名) + 부명(部名) + 인명(人名) + 관등명(官等名)’ 순으로 기재되어 있는 점에서 ‘계해년(癸亥年)’은 543년(진흥왕 4)과 603년(진평왕 25) 및 663년(문무왕 3) 중 어느 하나에 해당될 것으로 보면서 543년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영호와 이용현은 ‘계해년’의 시기를 543년, 603년, 663년, 723년(성덕왕 22), 783년(선덕왕 4) 등이 가능한데, 이 각석문에서 간지로 연대를 표시한 점, 중고기 금석문이라면 보여야 할 부명이 나타나지 않은 점, 인명의 존칭접미사 지(智)가 여전히 사용되는 점들을 중시하여 신라 금석문에서 부명의 표기가 사라진 7세기 중엽 이후와 기년표시가 692년 이후에는 중국 연호로만 표기하고 있는 점을 들어 그 시기는 663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하였다.
명문의 내용에 대해서도 이영호는 3월 8일을 태양력으로 환산하면 4월 20일이 되므로 24절기의 하나인 ‘곡우’로 추정하고 굴신을 모신 성류굴과 그 주변에서 봄날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나 제의가 거행되었다고 추정하였다. 또 ‘此亰’과 ‘大息食’을 연결하여 창고를 열고 크게 쉬고 먹었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동해안지역에는 신라 화랑도의 유오지가 많이 위치하는데, 제천 점말동굴이 화랑도의 유오지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성류굴도 화랑이나 낭도들이 즐겨 찾던 명소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한편 이용현은 고인(姑人)을 점복과 관련된 여성으로 추정하면서 59촌의 점복인들이 20일간 쉬고 먹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면서 이를 종교행위의 일종으로 보고 성류굴에서 대규모의 종교행위가 이루어졌다고 추정하였다.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1963년 지정)의 출구에서 우측(보는 방향 기준)으로 70㎝ 떨어져 높이 170㎝ 지점의 바위 면에 음각되어 있다. 명문은 석회암면 중 가로 30㎝, 세로 20㎝ 정도 크기의 편평한 면적에 세로 7행으로 모두 39~40여 자를 새겼으며, 글자 한자의 크기는 가로 3㎝, 세로 4㎝ 내외 정도이다. 글자체는 예서와 해서가 함께 사용되었는데, 대체로 고졸한 예서풍이 남아 있는 해서체이다.
울진 성류굴의 입구에 신라시대 방문기가 새겨져 있는 것은 이 동굴이 오래전부터 신성한 명승지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신라 왕경의 관리가 울진 성류굴에 왔다간 것은 이곳의 신성함과 관련시켜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1973년 지정)과 더불어 풍광 좋은 암벽에 새긴 삼국시대 명문은 매우 귀한 것으로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특히 충북 제천 점말동굴 입구에 각석문들이 있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뿐만아니라 성류굴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보질도태자 이야기, 고려 말의 동굴탐방기인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 조선 전기의 김시습의 성류굴 시(詩), 조선 후기의 겸재 정선의 성류굴그림(1734년) 등 각 시대의 다양한 사료가 남아 있어 성류굴의 문화사적 중요성과 고대 울진지역의 역사상을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