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한림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대대리 추정 고인돌 또는 고분개석 노출지역으로 명명되어오다가 2005년 강원문화재연구소의 시굴조사로 고인돌와 청동기시대 주거지 2~3기가 확인되었다. 이후 2006년 예맥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유적은 태백산맥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능선에서 다시 남쪽으로 좁고 짧게 분지된 능선 상에 위치한다. 유적의 남쪽으로는 ‘북천(北川)’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동해로 유입되며, 북천 주위로는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고성대대리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주거지 11기, 청동기시대 후기의 고인돌 1기, 시대불명의 구상유구 1기, 조선시대의 토광목관묘 5기 등 모두 18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남-북 방향의 능선을 따라 길게 배치되어 있으며, 모두 2시기에 걸쳐 축조된 단위 취락군으로 판단된다. 모든 주거지는 기반층인 풍화암반층을 거의 수직에 가깝게 굴착하여 조성하였으며, 평면 형태는 방형과 장방형으로 구분되며, 방형은 1호 주거지뿐이다. 특히 1호 주거지는 가장 높은 해발 40m 정상부에 단독으로 위치하며, 나머지는 해발 28m 지점부터 주거지간 약 520m 간격을 두고 능선의 주행방향을 따라 열상으로 배치되었다. 소형의 주거지(24호)는 능선의 상부에, 중대형 주거지(5~11호)는 능선의 아래쪽에 배치된 양상을 보인다. 주거지는 대부분 독립되어 배치되나 6호(선축)와 7호(후축) 주거지, 9호(선축)와 10호(후축) 주거지는 중복되었다. 주축방향은 등고선과 평행한 동-서항(2 · 4 · 5 · 7 · 8호)과 직교하는 남-북향(3 · 6 · 9 · 10호)로 나뉜다.
주거지의 내부시설로는 바닥상면시설, 노지, 벽구, 주혈, 집수공, 저장공이 확인된다. 주거지의 상면은 점토다짐(2 · 5 · 6 · 8 · 11호) 또는 맨바닥(3 · 4 · 10호)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노지는 3 · 5 · 6 · 7 · 8 · 11호에서 확인되었다. 노지시설은 무시설식의 평지형 노지(3 · 11호)와 토광형 노지(5 · 7호), 위석식 노지(6 · 8호)로 분류된다. 노지는 대체적으로 주축방향이 동-서향일 경우 동벽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남-북향일 경우 북벽쪽으로 치우쳐 있다. 벽구는 벽체 홈으로 사용된 것(2 · 6 · 8호), 벽체 홈과 배수구의 용도로 내구와 외구의 2중으로 시설된 것(2 · 6 · 8호) 및 배수구로 사용된 것(5호) 등 3종류로 나뉜다. 주혈은 모든 주거지에서 확인되며, 저장공은 일부 주거지(2 · 3 · 6 · 10호)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모든 주거지에서 시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파괴로 인해 조사 시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저장공은 주거지의 모서리에 치우쳐 나타난다.
유물은 5호 주거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주거지에서 토기와 석기가 1~2점 정도 출토되었다. 토기는 무문토기 · 공열토기 · 구순각목공열토기 · 구순각목토기 · 단도마연토기가 출토되며, 석기는 유단식 석검 · 주형 석도 · 삼각만입형 석촉 · 석부 · 지석 · 대석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시기는 청동기시대 전기로 추정된다.
구상유구는 7호와 8호 주거지 사이에 조성되었는데, 6 · 7호 주거지보다는 후행할 것으로 추정되나 자세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고인돌는 5호와 6호 주거지 사이의 평탄한 면에 위치한다. 동-서 약 420㎝, 남-북 약 350㎝의 방형 묘광을 파고 내부에 세장방형의 석곽을 조성하였는데, 먼저 할석을 시상에 깐 후 벽석과 충전토를 동시에 축조하고, 장축(동-서) 약 350㎝, 단축(남-북) 약 300㎝의 규모로 방형의 묘역을 형성한 후 석곽의 상부에 상석을 덮은 개석식 고인돌이다. 석곽 내부의 규모는 장축(동-서) 약 230㎝, 단축(남-북) 약 60㎝, 깊이 약 50㎝이며, 상석은 판석형의 괴석으로 동-서 230㎝, 남-북 150㎝, 두께 약 28㎝이다. 상석과 석곽의 장축방향은 동-서향으로 묘광의 장축방향과 평행하지 않고 남-북으로 약간 틀어져 있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 고인돌는 이단의 시상구조를 가진 속초 조양동 1호 고인돌와 차이를 보이지만, 방형의 묘광과 묘역의 구축 및 세장방형의 매장주체부와 개석식 상석의 축조라는 면에서 속초 조양동 1호 고인돌와 유사하여 청동기시대 후기의 묘제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고인돌는 주거군과 별도의 묘역을 가지는데, 이 고인돌는 주거지 사이에 축조되고 있어 특이하다. 그러나 주거지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조성된 유구이므로 결국 고인돌 단독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토광목관묘는 5기로 모두 6~8호 주거지 주변에만 분포하고 있다. 묘제는 묘광을 굴착하고 목관을 안치 한 후 묘광과 목관 사이를 흙으로 충전하고 목관의 상부도 흙으로 덮었다. 평면 형태는 모두 세장방형이며, 장축방향은 모두 능선방향과 동일하고 등고선과 직교한 남-북향을 하고 있다. 주축방향으로 보아 두침은 북향으로 판단된다. 유물은 1 · 2 · 3 · 5호에서 청동합 · 청동숟가락 · 백자대접 · 백자접시 · 백자병 등이 출토되어 조선시대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4호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그 시기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무덤들과 조성방법이 동일하고 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동일한 장축방향을 한 배치로 보아 동일한 시기로 추정된다.
고성대대리유적의 주거지는 중복관계를 통하여 1 · 3 · 6 · 8 · 11호 주거지가 하나의 군을 이루고 2 · 5 · 7호 주거지가 다른 하나의 군을 이루어 청동기시대 최소한 2시기 이상의 취락이 존속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시간적인 차이는 거의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기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결과 및 주거지 규모와 유물의 변화양상을 검토해 보았을 때, 서기전 12세기 후반에서 10세기 후반으로 속초 조양동유적과 강릉 방내리 A군 주거지와 거의 병행하는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의 이른 시기로 볼 수 있다.
고성대대리유적은 자연적인 삭평과 인위적인 절토에 의해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지만, 주거지의 내부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양호한 자료와 유물이 출토되어 영동지역의 청동기시대 주거연구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