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천부동유적은 울릉도의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다. 서 · 동 · 남쪽에는 높이 400m 이상의 산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한 눈에 들어온다. 유적은 천부초등학교 서편과 뒤편(남쪽)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에 분포한다. 1963년 국립박물관 조사 시 서쪽 구릉에서 2~3기, 남쪽 산 정상 부근에서 2기, 서남쪽 구릉에서 3기의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이중 4기가 발굴조사 되었다. 1998년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천부초등학교 서편 100m 지점의 능선에서 4기의 고분을 조사하였으며, 1998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와 2002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현, 경북문화재단 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고분군은 주로 구릉이나 산등성이에 23기씩 분포하고 있다. 주 분포지는 천부초등학교 서쪽 부근으로 남쪽의 가파른 능선이 북쪽의 바다 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해발 약 81m 지점에 와서는 완경사를 이루는데 전체적으로 해발 60150m 사이에 유적이 분포한다. 현재 밭 경작으로 인해 고분은 대부분 훼손되어 흔적만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이전에 조사된 고분의 정확한 위치나 규모, 형태를 파악하기는 아주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 이 일대에서는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의 토기편이 다수 수습되고 있다.
그동안 이곳에서 1963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고분 4기가 처음으로 발굴조사 되었는데, 당시 2호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굴된 상태였다. 1호분은 동북향의 입구를 가지며, 장축방향은 동북-서남향이다. 석실 규모는 길이 600㎝, 하단 너비 130㎝, 상단 너비 110㎝, 높이 140㎝ 정도이며, 벽석은 약간 내경하게 쌓았고 천장의 개석은 7매가 남아 있다. 입구는 큰 판석으로 막았던 것 같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유물은 사이호 · 고배 · 사각병 · 청동제 십금구 · 동령 · 유리옥 등 많은 양의 토기류와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특히 1호분은 울릉도에서 확인되는 고분 중에서 보기 드물게 통일신라의 금동제품, 유리옥, 토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일괄로 출토된 점이 특징이다.
2호분은 1호분에서 서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입구는 동북향이며 장축방향은 동북-서남향이다. 석실 규모는 길이 985㎝, 하단 너비 140㎝, 상단 너비 90㎝, 높이 160㎝ 정도로 매우 세장한 편이고 벽석은 약간 내경하게 쌓았고 천장 개석은 14매가 덮여 있으며, 상부는 할석으로 덮었다. 석실은 원래의 지표를 약 40㎝ 굴착한 뒤에 이를 바닥으로 삼았다. 유물은 인화문장경병 · 사각호 · 장군형토기 · 주름무늬병 · 청동팔찌 · 석제방추차 · 인골 등이 출토되었다.
3호분은 2호분 서쪽에 동서로 길게 자리한다. 입구는 동향이며 장축방향은 동-서향이다. 석실의 구조는 입구를 제외한 삼면의 벽석을 약간 내경하게 쌓았으며, 바닥에는 12㎝ 내외의 자갈돌이 깔려 있다. 규모는 봉석이 동-서 약 930㎝, 남-북 약 610㎝이며, 석실은 길이 600㎝, 너비 120㎝, 높이 140㎝ 정도이고 천장의 개석은 6매가 남아 있다. 유물은 사각호 · 인화문장경병 · 철도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4호분은 3호분의 서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입구는 서향이며 장축방향은 동-서향이다. 규모는 봉석이 남-북 약 800㎝, 동-서 약 1,100㎝이고 석실은 길이 560㎝, 하단 너비 140㎝, 상단 너비 110㎝, 높이 90㎝ 정도로 벽석은 약간 내경하게 쌓았고 천장 개석은 7매가 남아있다. 입구 앞 지표에는 판석이 깔려있는데 입구 막음돌이 넘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 일대에서 1998년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의해 4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1963년 조사된 고분들인지 그 상관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1호분은 천부리 678번지에 위치하며 발견 당시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였다. 상부의 봉석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측벽과 천장은 비교적 원형을 간직하였다. 규모는 길이 900㎝, 높이 150㎝ 정도이다. 2·3호분은 천부리 677번지 일대에 약 30m의 거리를 두고 위치한다. 두 고분은 대부분 허물어져 훼손되었다. 4호분은 천부리 665번지 일대의 완경사지에 있으나, 고분 전체가 풀과 나무로 덮여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적색연질토기와 신라토기편들이 지표에 고르게 분포하여 확인되고, 이 일대가 비교적 완경사지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 고분뿐만 아니라 주거지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특히 1998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 의해 이곳에서 4세기대의 토기 호편 1점(두께 7㎜, 도질, 소성 양호, 표피 적갈색, 속심 회색, 기내면 지두흔, 물손질흔, 기외면 타날흔, 세석립, 소량의 정선된 점토)이 지표채집 되었다. 이 1점의 토기편으로 단언키는 어려우나 6세기 이전의 유물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어 향후 자료의 증가가 기대된다.
천부리에 분포하는 고분은 울릉도의 현포리나 남서리 고분군처럼 십 여기 이상 다수의 고분이 군집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2~3기의 소수가 무리를 이루며, 구릉이나 산등성이에 위치하여 바다를 조망하는 곳에 분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이 지역이 넓은 완경사지나 평야가 없고 구릉이나 큰 규모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많은 고분군을 형성할 공간이 없는 지리적 특성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울릉도 고분은 일반적으로 하부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횡구식 석실묘를 조성하고 상부에 돌들을 쌓아 봉토(봉석)를 이루어 울릉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그러나 이곳 천부리 2호분은 도굴되지 않은 고분으로 발굴조사 결과, 울릉도 여타 지역에서 확인되듯이 경사지에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석실을 축조한 것이 아니라 원래의 지표를 파서 석실 바닥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이 밝혀졌다. 또 그동안 6세기를 천부리의 고분축조 상한 시기로 보았는데, 4세기의 토기편이 확인되어 그 시기는 올라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특히 고분과 주변에서 6세기 중엽의 단각고배, 7세기 후반의 대부완과 대부병, 9~10세기의 사각병 · 편병 · 주름무늬병들이 다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긴 기간 동안 계속해서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