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삼남매 중 외동딸로 출생하여 어린 시절 안식교회를 다녔다. 강서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큰 오라버니를 따라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평양에서 정의여학교를 다니면서 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정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마산 의신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교사 시절 마산 문창교회를 다녔는데, 이곳에서 주기철(朱基徹) 목사를 만나 결혼하였다. 주기철 목사가 1936년 여름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에 부임하자 오정모도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부부가 모두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하였으며, 주기철 목사는 1944년 4월 21일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오정모는 1945년 광복 이후 왼쪽 유방암이 발병하여 수술한 후 회복되었으나 재발하여 1947년 1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일제는 황국신민화정책을 폭압적으로 펼쳤고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1939년 초를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의 본거지는 주기철 목사가 재직하고 있던 평양 산정현교회였다. 주기철목사는 1939년 3월 농우회(農友會) 사건에 연루되어 검속되었으며, 석방된 뒤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로 인해 주기철 목사는 1940년 7월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목사직을 파면 당하였다. 산정현교회도 폐쇄되었다.
당시 기독교여성들 역시 학교, 기독교 여성단체 그리고 개인적 투쟁 등을 통해 신사참배거부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 오정모였다. 오정모는 십여 차례 일경에게 검거를 당해 고통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산정현교회가 폐쇄된 후 오정모는 교인들을 규합하여 민족과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구심점이 되었다. 수감되어 있는 주기철 목사에게는 무죄가 되기 전에는 절대 굴복하지 말 것을 독려하며 민족과 신앙을 지키고 일제에 끝까지 항거할 수 있는 힘을 북돋워주었다.
2016년 기독교문화선교공동체 ‘더 웨이(The way)'는 창단 작품으로 민족과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정모의 이야기를 담은 뮤직드라마 「일사각오(一死覺悟)」를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