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식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 출신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제과 제빵 장인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일본으로 건너가 제과 제빵을 시작하였고, 본인이 화공 약품상에서 직접 첨가제를 제조하여 만들어 볼 정도로 실험 정신이 뛰어났으며, 각종 기술 경연 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 제과부 책임자로 근무하였고, 광복 후 귀국하여 호산나, 월화당, 형제당, 풍년제과, 크라운제과, 뉴욕제과 등 유명 점포에서 근무하였다. 1962년 대한제과기술연구연합회 창립에 관여하여 한국 양과자 기술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김환식(金煥湜, 1914~2001)은 1914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에서 태어났으며, 2001년 2월 11일에 사망하였다.
김환식은 고창고보(高敞高普) 재학 중 일본으로 건너가 제과 기술을 배웠다. 1929년 일본인 이세곤지로의 제자로 들어가 1년이 지나도록 반죽하는 일을 맡아 밀가루, 유지, 설탕 등을 계량하였지만, 첨가제는 계량을 할 수 없고 비밀리에 작업을 하여 내용물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에 첨가물을 일부 덜어내어 일이 끝난 이후에 화공 약품상에 가서 첨가물의 종류가 명반, 암모니아, 주석산, 탄산나트륨이라는 것을 파악하였다. 일과가 끝난 후 이들 약품을 구하여 실험 조리를 통해 기술 향상을 이루어냈다. 이에 각종 기술 경연 대회에서 1등을 수상하게 되었고 일본 일류 제과점에서 일을 하며 공장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일본에서 8년만에 귀국하여 ‘미도리야’ 제과점에서 제과 기술자로서 출발하였고 일본 양과자협회 해외 기술 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5년 당시 서울에는 ‘킹구도’, ‘고베야’, 그리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제과점이 한 군데 정도 있는 실정이었다. 지방에는 전라도 광주, 강원도 철원, 함경도 회령, 경기도 개성 등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제과점이 1곳 정도 있었고, 인구 2만 명 이상인 읍(邑) 단위마다 제과점이 있을 정도로 많은 화과자, 양과자, 캔디점이 있었다.
김환식은 이후 2년 동안 고향에서 지내다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 제과부 책임자로 근무하였다, 광복 후에 귀국하여 호산나, 월화당, 형제당, 풍년제과, 크라운제과(현 크라운베이커리), 뉴욕제과 등 유명 점포에서 근무하며 제과 제빵 기술의 확산에 기여하는 활동을 펼쳤다. 김환식은 세심한 관찰력을 지닌 인물로 ‘설탕’ 공예에 있어서는 일본에서 1인자였으며 한국에서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는 1930년대에 이미 천연 효모빵의 원리와 제조 방법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1962년에는 마드렌느를 만들었다. 또한 현재 사용하는 이스트가 판매되기 이전에도 스스로 이스트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로 재료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다. 1962년 대한제과기술연구연합회 창립에 관여하여 한국 양과자 기술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제자 양성에도 힘썼다.
김환식은 정부의 혼분식장려운동이 시작되던 시기에는 『빵과 케잌의 가정조리법』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제과 제빵 기술의 확산에 기여하였고, 직접 제과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