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주식(主食)은 쌀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 이전까지 쌀 생산량의 부족으로 쌀밥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런 쌀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일제시대부터 국가가 절미운동(節米運動)의 일환으로 혼식과 분식을 강제하는 식생활개선 정책이 시행되었다. 일제시대의 절미운동과 혼분식 장려운동은 해방 이후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지속되었다. 1950년대에 정부에 의해 절미운동이 실시되다가 1956년부터 미국의 잉여 농산물 원조가 제공되면서 혼분식장려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혼분식장려운동은 1960년대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산하 식생활개선추진위원회가 그 업무를 담당하였고, 그 이후 농림부 양정국 양정과에서 주도하다가 1973년 농림부 식량국 산하 식생활개선과에서 담당하였으며, 1970년대 전국적인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기도 하였다.
정부는 1967년부터 1976년까지 매년 혼분식 관련 행정명령을 시달하다가 1977년에 들어서 그 행정명령을 해제하였다. 그 기간 동안 모든 음식점은 밥에 보리쌀이나 면류를 25% 이상 혼합하여 판매해야만 했고, ‘분식의 날’이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 행정명령을 위반한 음식점은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를 통해 가정에서도 혼분식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런 강력한 정부의 혼분식장려운동으로 1976년에는 밀 수입량이 연간 170만톤이나 되었고, 정부는 외화 절약을 위해 혼분식에서 혼식 장려로 정책을 변경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유명무실화된 혼분식 장려 정책이 폐지되었다.
국가 주도의 혼분식장려운동으로 한국인의 주식이 쌀과 보리에서 쌀과 밀로 바뀌게 되었다. 그 결과 라면, 빵 등 서구화된 음식문화가 형성되게 되었다. 또한 혼분식장려운동과 함께 저곡가 정책이 추진되어서 농촌 경제난이 심화되었고, 1980년대 이후 잉여 쌀 소비 문제가 대두되게 되었으며, 과도한 수입 곡물 의존으로 식량 안보 문제와 농산물 안전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