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국민운동 ()

사회구조
사건
5·16 이후 인간 개조와 사회 개혁을 추진하며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군사 정부가 설립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1961년부터 6월부터 1964년 8월까지 추진한 사회운동.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961년 6월
종결 시기
1964년 8월
관련 국가
대한민국
관련 단체
재건국민운동본부, 재건국민운동 중앙회
관련 인물
박정희, 유진오, 유달영,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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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재건국민운동은 5·16 이후 인간 개조와 사회 개혁을 추진하며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군사 정부가 설립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1961년부터 6월부터 1964년 8월까지 추진한 전 국민 사회운동이다. 이 사회운동은 복지 국가를 이룩하기 위하여 전 국민이 민주주의의 이념 아래 협동 단결하고 자조·자립 정신으로 향토를 개발하며 새로운 생활 체제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또한 군사 정부의 물적·행정 자원을 동원하는 동시에 민간에서 각 분야의 지식인들이 참여하여 전국의 지역 단위에 이르기까지 인간 개조와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정의
5·16 이후 인간 개조와 사회 개혁을 추진하며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군사 정부가 설립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1961년부터 6월부터 1964년 8월까지 추진한 사회운동.
발단

5·16 세력은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제2공화국 시기 범람했던 무질서, 방종,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침체된 국민 의식을 고양하고자 했다. 5·16 세력은 쿠데타를 ‘국민 혁명’으로 만들어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전 사회 지도층이 참여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했다.

배경

구한말 시기 조선 사회에 유입된 사회 진화론을 받아들인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부터 개인 차원에서는 근면과 자조를 통해 가난을 극복하고, 사회적으로는 경제 발전을 성취하여 민족 부흥을 꾀하였다. 이광수‘민족개조론’을 시작으로 조선인 개인의 변화를 통해서 사회 변화를 촉발하고자 한 노력의 시작은 인간 개조 논의로 이어졌다. 이에 근대적 인간 만들기는 사회 개혁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 되었다. 제1공화국의 독재와 부정부패, 제2공화국의 무능과 만연한 무질서 · 방종 등을 극복하고자 했던 군사 정부는 당시 인간 개조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던 사회적 인식을 활용하여 재건국민운동을 시작하였다. 사회는 적자생존의 방식을 통해 야만에서 문명사회로 진화한다는 이론을 제시한 사회 진화론을 숭배했던 조선의 지식인들과 해방 이후의 사회 지도층은 독재와 상관없이 인간 개조와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이에 많은 지식인들이 혁명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박정희는 이를 이용하여 많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비정치적인 영역이었던 사회 개혁의 분야에 참여시켰다.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던 지식인은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을 역임했던 유진오, 유달영, 이관구 등이었으며, 비판적 지식인들이었던 고재욱 동아일보 주필, 장준하 사상계 사장, 홍종인 조선일보 회장 등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 중앙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경과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1961.6.11.)에 따르면 재건국민운동은 “복지국가를 이룩하기 위하여 전 국민이 민주주의 이념 아래 협동 단결하고 자조 · 자립 정신으로 향토를 개발하며 새로운 생활 체제를 확립하는 운동”이다. 박정희가 자신의 글 「혁명 과업 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국민운동의 방향」에서 직접 밝힌 운동은 공산주의를 용인하는 중립 사상의 배격, 물자가 넉넉하지 못해 겪는 어려운 상황을 참고 견디는 생활 실천, 근로정신 고취, 생산 및 건설 의식 증진, 국민 도의 앙양(昂揚), 정서 순화, 국민 체위 향상 등의 7개의 실천 요강으로 구성되었다. 구체적인 세부 항목에는 민족 긍지를 드높임, 수입 내 지출, 창의력을 북돋움, 협동적 생산 활동, 부정부패 배척, 국민 단합, 전통 계승 등을 담고 있었다.

결과

쿠데타 세력은 재건국민운동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고자 재건국민운동 본부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 기구로 배치했다. 재건국민운동 본부가 1961년 5월 27일에 공포된 「최고회의법」에 의거하여 발족하고,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면서 재건국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군사 정부는 곧바로 전국에 조직을 확대했는데, 각 중앙의 본부 이외에 각 지방의 구, 군, 읍, 면, 반 등에 전국재건청년회, 부녀회, 집단 촉진회 등을 설치하였다. 그해 11월 대학 및 중고등학교 촉진대를 해체하여 재건 학생회 1,386개를 발족시켰다. 1961년 말에는 설치된 관련 단체가 12,982개에 이르렀다. 민간운동으로 성격이 변화되면서 1964년 8월 재건국민운동 본부가 해체되었다. 이후 운동을 민간 주도의 국민운동으로 변환하기 위해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설립 · 운영되었으나 소관 업무가 내무부로 이관되면서 1975년 12월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의의 및 평가

박정희 자신도 인정했듯이, 재건국민운동은 국가가 통제하는 운동에 그쳤으며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재건국민운동을 통하여 주민의 적극 참여와 경쟁 과정에서 기대 이상의 큰 성공을 거두었던 농촌 마을의 사례를 확인했다. 이는 이후 새마을 가꾸기 사업에서 지식인이나 정부의 위계적 조직 및 명령에 의존했던 운동 추진 방식을 대폭 수정하여 자율적인 하부 마을을 중심으로 서로 경쟁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농촌 사회의 자본주의화를 통한 근대적 한국인 만들기였던 전면적 인간 개조 운동은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참고문헌

원전

박정희, 『혁명 과업 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국민운동의 방향』(1961)
박정희, 『한국국민에게 고함』(동서문화사, 1972)

단행본

노영기 외,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도서출판 선인, 2004)
民主韓國革命靑史編輯委員會, 『民主韓國革命靑史』 (民主韓國革命靑史編纂委員會, 1962)
韓國軍事革命史編纂委員會, 『韓國軍事革命史 第一輯(上)』(國家再建最高會議韓國軍事革命史編纂委員會, 1964)

논문

전재호, 「5·16 군사정부의 사회개혁정책: 농어촌고리채정리사업과 재건국민운동을 중심으로」(『지역과 세계』 34-2, 전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10)
허은, 「‘5·16군정기’ 재건국민운동의성격-'분단국가 국민운동' 노선의 결합과 분화」(『역사문제연구』 11, 역사문제연구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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