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1921년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했다. 1925년 6월 『시대일보(時代日報)』 평양지국 기자를 시작으로 평생 언론활동에 종사했다. 1926년 『시대일보』가 『중외일보(中外日報)』로 바뀐 뒤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며 1928년 1월 1일 평양에서 문예동인지 『백치(白雉)』를 창간해 발행인이 되었다. 1929년 조선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1940년 일제당국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까지 활동하며, 『조선일보』뿐 아니라 다른 신문·잡지 등에도 수많은 글을 남겼다. 일반 기사나 논설뿐만 아니라 특히 동·서양의 음악에 모두 조예가 깊어 음악평론가로 소개될 정도였으며, 도예·미술·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을 보였다. 1923년 『개벽(開闢)』 34호에 「용강민요(龍岡民謠) 30수」를 발표한 이래, 『동아일보』·『조선일보』·『동광(東光)』·『신동아』·『삼천리』·『조광(朝光』 등 각종 언론에 연주평을 연재하는 등 음악 관련 글을 꾸준히 발표했다.
1934년 4월 동요 작곡가 ‘윤극영(尹克榮) 후원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36년 4월 잡지 『음악평론』에 김관(金管) 등과 함께 음악평론가의 한 사람으로 소개되었다. 그해 10월 3일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주최로 가극 춘향전이 공연될 때 「고전 가곡의 재출발, 창극 춘향전 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9월 19일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서 북중국전선에 종군기자로 특파되었다. 그해 10월 18일부터 25일까지 『조선일보』에 「석가장(石家莊)에서 본 본사 특파원 홍종인 수기」라는 종군기를 연재했다. 또한 『조선일보』에 기명으로 특집기사를 여러 차례 연재했으며, 잡지 『조광』에 친일 관련 글을 기고했다. 1938년 조선일보사 사회부장 겸 체육부장으로 승진했으며,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10월부터 매일신보사로 옮겨 사회부장 겸 정치부장, 1942년 11월부터 사회부장 겸 체육부장을 지냈다.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參事)로 선임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12월 1일 복간된 『조선일보』로 복귀해 사회부장을 맡았다. 이후 정경부장, 편집부국장을 거쳐 편집국장으로 승진했으며, 1948년 11월부터 1959년 9월까지 10여 년 동안 주필로 활동했다. 그 사이 1952년 4월부터 1958년 11월까지 부사장, 1959년 9월부터 1963년 5월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중 언론기관이 부산으로 내려가 있을 때에는 현지의 민주신보사(民主新報社) 고문으로 활동하며, 1952년 일본 도쿄에 머물면서 「미 국무부의 재한(在韓) 일본인 재산청구권 일축 경위」, 「재한 일본인 재산청구권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 등을 『민주신보』에 급보(急報)하기도 했다.
한편, 해방 이후 등산에 남다른 활동을 보였다. 1946년 한국산악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1949년부터 1967년까지 회장으로 활동했다. 산악회를 이끌면서 학술조사를 병행한 등반답사 사업을 벌여, 1947년과 1954년 두 차례 울릉도-독도를 답사했고, 1951년 9월 제주도 서남해상의 파랑도(이어도)를 탐사하기도 했다.
1958년 1월 독립기념사업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언론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활동에 꾸준히 참여해 1957년 3월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창립을 주도했다. 그해부터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중심이 되어 선거법 개정안 중 언론 조항 삭제를 추진하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여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8년 4월 7일 신문편집인협회 운영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취재의 자유 보장, 기자 구타사건 불식 등을 내무장관에게 요청하는 등 언론자유 쟁취를 위한 활동을 벌여, 1959년 1월 필리핀 막사이사이상 신문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그해 5월 18일 비판신문사에서 주최한 제2회 신문인상(新聞人賞)에서 논설상을 수상했다.
1961년 12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이사, 1962년 2월 공보부 자문 언론분과위원회 위원, 1964년 1월 사단법인 한국신문회관 부이사장을 맡았으며, 같은해 4월 7일 ‘신문의 날’을 맞아 신문연구소가 정식으로 발족될 때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후에도 언론자유를 위한 활동을 계속해, 1964년 8월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전국언론인대회를 개최, 악법철폐투쟁을 결의하고 채택된 건의문을 12일에 청와대에 전달하기도 했다.
1964년 11월 27일 동화통신사(同和通信社) 회장에 취임하여, 1971년 12월 24일 ‘동화통신사원 집단면직사건’으로 사임하기까지 활동했으며, 1974년 정부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반정부적이었던 『동아일보』의 광고 계약을 무더기로 해약했던 일명 ‘동아사태’ 때, 12월 28일부터 세 차례에 걸쳐 개인 이름으로 5단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이전부터 조예가 깊었던 문화·예술 분야 활동을 재개했다. 1974년 10월 신세계미술관에서 판화가 이항성(李恒星)과 함께 도화전(陶畵展)을 개최했으며, 1978년 12월에도 이항성과 함께 한국화랑에서 송년기념전을 개최했다. 1974년 10월 사단법인 박물관회(博物館會)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1976년 9월 9일 국어순화추진위원회 발족 때 이사가 되었다. 1976년 10월 20일에는 문화예술계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언론계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 박식하고 활동의 폭이 넓어, 언론계 인사들 사이에서 ‘홍박(洪博)’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1987년 후배 언론인들에 의해 『대기자(大記者) 홍박: 언론인 55명이 본 홍종인 선생』이 발간었으며, 저서로는 논설집 『인간의 자유와 존엄』(1965)과 『신문의 오늘과 역사의 내일』(1989) 등이 있다. 1995년 3월 20일 제11회 서울언론인클럽 언론상 시상에서 ‘언론인 한길상’을 수상했으며, 1998년 6월 10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