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남북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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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오하영 (吳夏英)
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원세훈 (元世勳)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다. 성균관 수료 후 일본에 유학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1950년 총선에서 전국최다득표자로 선출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조소앙 (趙素昻)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58년에 사망했다. 성균관 수료 후 일본에 유학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바탕으로 삼았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1950년 총선에서 전국최다득표자로 선출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최익한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간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897년 경북 울진 출생으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약하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유학 중 일월회와 조선공산당 일본부에서 활동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7년간 복역 후 학문활동에 전념하였다. 해방 후 우익을 보다 넓게 포괄하려는 입장에서 민족주자연맹에 참여하였고, 1948년 월북한 후 학문연구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학연구의 선구자로 대표적인 저술서로 『실학파와 정다산』이 있다.
최익한 (崔益翰)
최익한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간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897년 경북 울진 출생으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약하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유학 중 일월회와 조선공산당 일본부에서 활동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7년간 복역 후 학문활동에 전념하였다. 해방 후 우익을 보다 넓게 포괄하려는 입장에서 민족주자연맹에 참여하였고, 1948년 월북한 후 학문연구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학연구의 선구자로 대표적인 저술서로 『실학파와 정다산』이 있다.
민주독립당은 1947년 10월 19일 홍명희 등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이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조짐을 보이자 홍명희 등 중간세력 중 ‘진정한 우익’을 자임하는 세력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남한단독선거 결정에 따른 유엔임시위원단 파견, 미소양군동시철수안 입장에서 안재홍의 지지파(단선수용파)와 홍명희 등의 반대파(단선반대파)로 내부 갈등이 표출되었다. 결국 안재홍의 지지파가 탈당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 남북협상으로 균열이 일어나 와해 위기에 있던 정당은 결국 1948년 9월 하순에 해체되었다.
민주독립당 (民主獨立黨)
민주독립당은 1947년 10월 19일 홍명희 등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이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조짐을 보이자 홍명희 등 중간세력 중 ‘진정한 우익’을 자임하는 세력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남한단독선거 결정에 따른 유엔임시위원단 파견, 미소양군동시철수안 입장에서 안재홍의 지지파(단선수용파)와 홍명희 등의 반대파(단선반대파)로 내부 갈등이 표출되었다. 결국 안재홍의 지지파가 탈당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 남북협상으로 균열이 일어나 와해 위기에 있던 정당은 결국 1948년 9월 하순에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