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송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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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으며, 임시의정원 법제위원, 정무조사 특별위원, 정치분과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나용균 (羅容均)
일제강점기 때,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으며, 임시의정원 법제위원, 정무조사 특별위원, 정치분과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연정회는 1923년 말부터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자치운동단체이다. 민족주의 계열에서 추진했던 실력양성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23년 12월에 연정회를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절대 독립에 대한 부정은 사회주의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1925년 이후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부활 계획이 다시 시도되었으나, 1927년 신간회의 결성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연정회 (硏政會)
연정회는 1923년 말부터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자치운동단체이다. 민족주의 계열에서 추진했던 실력양성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23년 12월에 연정회를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절대 독립에 대한 부정은 사회주의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1925년 이후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부활 계획이 다시 시도되었으나, 1927년 신간회의 결성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원세훈 (元世勳)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31년, 동아일보사에서 시사·평론에서부터 과학·운동·연예·취미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를 망라하여 발행한 월간 잡지.
신동아 (新東亞)
1931년, 동아일보사에서 시사·평론에서부터 과학·운동·연예·취미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를 망라하여 발행한 월간 잡지.
태평양문제연구회는 1925년 11월 동아시아 ‧ 태평양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결성된 민족주의 계열의 정치단체이다. 1925년에 개최된 제1차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고 국내에 돌아온 신흥우, 유억겸, 송진우 등은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설립하여 정치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25년 11월 28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모임이 열렸다.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는 중앙기독교청년회 및 『동아일보』 ‧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국내 민족주의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승만과 연결된 비밀조직인 흥업구락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태평양문제연구회 (太平洋問題硏究會)
태평양문제연구회는 1925년 11월 동아시아 ‧ 태평양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결성된 민족주의 계열의 정치단체이다. 1925년에 개최된 제1차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고 국내에 돌아온 신흥우, 유억겸, 송진우 등은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설립하여 정치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25년 11월 28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모임이 열렸다.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는 중앙기독교청년회 및 『동아일보』 ‧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국내 민족주의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승만과 연결된 비밀조직인 흥업구락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조만식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83년 평안남도 강서 출생으로 23세에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 유학 중 간디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한 후 일제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삼았다. 귀국 후 오산학교의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3·1운동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으며,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었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어린이대공원과 오두산통일전만대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조만식 (曺晩植)
조만식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83년 평안남도 강서 출생으로 23세에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 유학 중 간디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한 후 일제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삼았다. 귀국 후 오산학교의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3·1운동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으며,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었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어린이대공원과 오두산통일전만대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임정봉대론은 해방 직후 중경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한민당계 및 임정계열 인사들이 추진한 운동이다. 해방 직후 송진우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정통으로 환영 추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구 및 임정 세력도 환국과 함께 특별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으로 행보하였다. 1947년에 조직한 국민회의를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기관으로 천명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민당의 입장 보류와 김구의 남한단독선거반대와 남북협상 추진으로 임정법통론을 포기하게 되었다.
임정봉대론 (臨政奉戴論)
임정봉대론은 해방 직후 중경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한민당계 및 임정계열 인사들이 추진한 운동이다. 해방 직후 송진우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정통으로 환영 추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구 및 임정 세력도 환국과 함께 특별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으로 행보하였다. 1947년에 조직한 국민회의를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기관으로 천명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민당의 입장 보류와 김구의 남한단독선거반대와 남북협상 추진으로 임정법통론을 포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