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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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대사간, 부제학,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홍명구 (洪命耉)
조선 후기에, 대사간, 부제학,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홍응은 조선 전기 도승지, 이조판서, 의정부 좌의정 등을 지낸 문신이다. 1451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사간원 우정언과 좌정언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교리와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대 승지로 근무하다가 1462년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예종 대 남이(南怡) 옥사에 관한 공적으로 추충정난익대공신 익성군으로 녹훈되었다.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역임하였으며, 아들이 명숙공주와 혼인하여 부원군이 되었다.
홍응 (洪應)
홍응은 조선 전기 도승지, 이조판서, 의정부 좌의정 등을 지낸 문신이다. 1451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사간원 우정언과 좌정언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교리와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대 승지로 근무하다가 1462년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예종 대 남이(南怡) 옥사에 관한 공적으로 추충정난익대공신 익성군으로 녹훈되었다.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역임하였으며, 아들이 명숙공주와 혼인하여 부원군이 되었다.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었던 고려전기 에 창건된 사찰.
개성 광명사 (開城 廣明寺)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었던 고려전기 에 창건된 사찰.
총릉(聰陵)은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오산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30대 충정왕의 능이다. 총릉은 1352년에 조성되었으며, 북한 보존급유적이다. 총릉은 3층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으며, 1층단에 망주석 1쌍, 2층단과 3층단에 각각 석인이 1쌍씩 서 있다. 1978년 발굴 조사를 통해 내부 구조가 밝혀졌고, 널방에 부장되었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총릉 (聰陵)
총릉(聰陵)은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오산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30대 충정왕의 능이다. 총릉은 1352년에 조성되었으며, 북한 보존급유적이다. 총릉은 3층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으며, 1층단에 망주석 1쌍, 2층단과 3층단에 각각 석인이 1쌍씩 서 있다. 1978년 발굴 조사를 통해 내부 구조가 밝혀졌고, 널방에 부장되었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고려 후기에, 시학, 판전객시사, 금적사 등을 역임한 문신.
안길상 (安吉祥)
고려 후기에, 시학, 판전객시사, 금적사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시대의 사대부가 평상시에 쓰던 관.
충정관 (冲正冠)
조선시대의 사대부가 평상시에 쓰던 관.
원세순이 조선후기에 활약한 문인들의 시를 뽑아 1910년에 간행한 시선집.
병세집 (幷世集)
원세순이 조선후기에 활약한 문인들의 시를 뽑아 1910년에 간행한 시선집.
손수경은 고려 후기에 판삼사사, 도첨의정승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국왕의 측근으로 성장한 고려 후기의 대표적 인물이다. 충숙왕 아래에서는 원의 입성 책동을 저지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충혜왕의 복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충혜왕의 측근으로 조적의 난 등을 평정하여 다시 공신이 되었으며, 충정왕 당시 최고위직에 올랐다. 이후 공민왕 대 석기 추대 반란에 연루되어 사망하였다.
손수경 (孫守卿)
손수경은 고려 후기에 판삼사사, 도첨의정승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국왕의 측근으로 성장한 고려 후기의 대표적 인물이다. 충숙왕 아래에서는 원의 입성 책동을 저지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충혜왕의 복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충혜왕의 측근으로 조적의 난 등을 평정하여 다시 공신이 되었으며, 충정왕 당시 최고위직에 올랐다. 이후 공민왕 대 석기 추대 반란에 연루되어 사망하였다.
최유는 고려 후기 원에서 기황후를 설득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 옹립을 모의한 주모자이다. 조적의 난이 발생했을 때 충혜왕을 수행하여 원에 간 공으로 귀국 후 공신에 책봉되었다. 원에서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1348년(충정왕 즉위년) 충목왕이 사망했을 때 충정왕을 호종하여 그 즉위에 공이 있었다. 이후 포상 문제로 불만을 품고 다시 원으로 갔다. 기황후를 설득해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세우는 데 앞장섰다가 1362년(공민왕 11) 주살되었다.
최유 (崔濡)
최유는 고려 후기 원에서 기황후를 설득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 옹립을 모의한 주모자이다. 조적의 난이 발생했을 때 충혜왕을 수행하여 원에 간 공으로 귀국 후 공신에 책봉되었다. 원에서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1348년(충정왕 즉위년) 충목왕이 사망했을 때 충정왕을 호종하여 그 즉위에 공이 있었다. 이후 포상 문제로 불만을 품고 다시 원으로 갔다. 기황후를 설득해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세우는 데 앞장섰다가 1362년(공민왕 11) 주살되었다.